동구의 세 번째 극장, 중앙극장 (1930년~1980년)
✽ 극 장 명 : 중앙극장(中央劇場: 쥬오 게키죠)
✽ 개명극장명 : 대생좌(大生座) → 대생극장 → 한벗극장 → 중앙극장
✽ 주 소 지 : 부산부 초량정 207
✽ 현 주 소 지 : 동구 초량동 207번지
✽ 개 관 일 자 : 1930년 7월 22일
✽ 폐 관 일 자 : 1980년 12월 23일
✽ 대 표 : 오이케 겐지(大池源二)

초량좌(1914?~1917?)와 유락관(1921~1932)의 뒤를 이어 동구 지역에 세 번째 세워진 중앙극장은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를 맞으면서 처음 세워진 극장이다. 중앙극장은 유락관 관주 오이케 타다스케가 가나모리 신기찌(金森新吉)와 공동경영 조건으로 신축 중 오이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장자인 오이케 겐지가 승계받아 완공 개관을 보았다.05

개관 공연작은 도쿄의 오가미 도쇼 일행(尾上登昇大一座)의 가부키가 4일간 상연되었다. 요금은 특등석 1원 50전, 1등석 1원 20전, 2등석 80전으로 구분해서 받았다. 중앙극장의 관객 수용은 1932년 「부산상공안내」 자료에 의하면 상층 190명, 하층 310명, 계 500명이었으나 「소화17년(1942), 18년(1943) 영화연감」은 각 498명으로 극장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1955년 극장은 총 건평 306평 5합, 건평 496평 10합, 무대 28평으로 증축되었다.06

허가정원은 987석으로 좌석이 1층 500석, 2층 150석, 입석 337석으로 운영되어 오다 폐관 직전인 1977년 675석, 1979년 405석으로 축소 경영되었다. 50년 동안 경영되어 온 중앙극장은 연극공연 극장으로 출범했으나 1936년 상생관 대표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峰次郞)가 인수하면서 극장명을 대생좌(大生座: 다이 세이자)07로 바꾸고 상설영화관으로 전환 운영에 들어 갔다.

필름 배급은 근거리에 있었던 상생관과 동시 개봉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으며, 뒤이어 소화관, 보래관과도 연계하여 동시에 영화를 개봉했다. 일본 영화는 쇼치쿠, 대도(大都), 키네마, 일본PCL, 신흥키네마, 닛카츠 계열사의 작품이 상영됐다. 중앙극장이 소재했던 초량 지역은 조선 사람이 밀집 주거했던 탓으로 홀대 받던 조선 영화가 자주 상영되었다. 1932년 <방아타령>(31, 김상진), <금강한>(31, 나운규)을 시작으로 1934년 <아리랑>(26, 나운규), <아리랑2>(30, 이구영), 1936년 <홍길동전>(34, 김소봉), <춘향전>(35, 이명우), <장화홍련전>(36, 홍개명), <수일과 순애>(31, 이구영), <아리랑3>(36, 나운규), 1937년 <홍길동전>(34, 김소봉), <홍길동전 후편>(36, 이명우), <나그네>(37, 이규환), <미몽>(36, 양주남), <풍운아>(26, 나운규), <무화과>(35, 나운규), <그림자>(35,나운규), 1938년 <무지개>(36, 나운규), <인생항로>(37, 안종화), <청춘의 십자로>(34, 안종화), <임자없는 나룻배>(32, 안종화), 1939년 <세동무>(28, 김영환), <개화당이문>(32, 나운규), <낙화유수>(27, 이구영), <청춘부대>(38, 홍개명), <국경>(최인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명우), <무정>(박기채), <나의 친구여>(28,유장안), 1940년 <철인도>(30, 나운규), <큰무덤>(31, 윤봉춘), <회심곡>(30, 왕덕성), 1941년 <사나이>(28, 홍개명), <처의 모습>(39, 이창근), 1943년 <망루의 결사대>(이마이)가 상영됐다.

광복을 맞은 극장은 이정화(1946년 3월 10일 민주중보)가 관리했으나 미군정청은 같은 해 3월 15일 연예인 이정화와 국문학자 유열을 관리인으로 선정 경영하게 하나 곧 취소된 후 경남도 극장관리 위원회의 추천으로 한신교가 임명됐다. 1954년 「부산상공명감」은 이정화, 1959년 11월 전극극장일람표는 이종인, 1961년 이재훈, 1963년 최병권, 1966년부터 폐관 때까지는 이국형이 대표로 경영됐다. 극장명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광복 후인 1946년 7월 1일 대생좌에서 대생극장으로 바뀌었으나 1947년 10월 31일 한벗극장, 1950년 12월 11일부터는 개관 때 극장명인 중앙극장으로 다시 환원되어 폐관 때까지 사용됐다. 중앙극장은 1950년대 들어 초량동에 세워진 제2문화관(철도문화회관)과 대도극장, 초량극장, 천보극장과 함께 공존하여 왔으나 건물 노후화로 2, 3번관으로 전락해 오다 폐관되면서 극장이 헐린 자리에는 하나은행 초량지점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극장 개관과 관련하여 극장명, 관주, 개관연도, 건축동기 등을 발표한 2건의 기록은 마지막 경영주인 이국형 대표가 경영하던 1966년 이후 발표된 것으로 검증 결과 실체규명이 제대로 입증되지 않아 오류로 밝혀졌다.

그 내용을 보면 「부산흥행가」(박원표, 향토부산 1967)는

“당시 滿生峰次郞㈀은 일본 건축업자가 밀양에 세운 극장이 잘 되지 않는 것을
알자 그 건물을 뜯어 초량의 지금의 중앙극장 자리에 옮기고㈁ 대생좌를 개관하
여㈂ 한국사람을 상대로 하는 연극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

「한국극장사(5)」(박노홍, 월간한국연극, 1979)는

「대생좌」극장㈃, 이 극장은 부산부 초량정에 있었다. 杉下末次郞이 건립하였
다.㈄ 1923년경이었다 .㈅ 수용인원은 7백 명이다.㈆ 무대는 좁지는 않았다. 건립
초기엔 다다미를 깐 …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 중앙극장이 되었다.”

두 사례는 1930년 개관된 중앙극장의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나머지, 극장명을 개관 당시의 중앙극장을 미쯔오가 인수, 경영했던 대생좌 시대 ㈂, ㈃로 각각 기술하는 오류를 드러냈다. 최초의 건축주도 오이케 겐지 대신 1936년 인수하는 미쯔오㈀와 스기시타(杉下末治郞)㈄로 각각 적고 있다. 미쯔오는 오이케가 건축 중 사망하자 장자 오이케 겐지가 승계하여 완공 후 개관, 경영하여 오던 중 1936년 미쯔오가 인수, 대생좌로 개명 경영했으며 스키시타는 「소화 17년, 18년 영화연감」(일본영화잡지협회, 1942~1943년)에서 해당연도의 대생좌 대표로 기록된 자를 이 극장을 건립했다고 적었다. 개관연도는 1923년경㈅으로, 수용인원도 「부산상공안내」(1932)가 500명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700명㈆으로 적고 있다. 특히 미쯔오가 밀양의 극장 건물을 뜯어다 세웠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와같이 중앙극장의 경우는 원전 사료의 검증없이 잘못된 기술을 퍼나르기 식으로 재생산하는 사례가 있어 이는 학술적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며 증빙사료 제시를 무시한 불명확한 구술증언을 정리하는 사례는 지양돼야 할 것이다.


05 1930년 7월 21일 부산일보
06 부산극장협회 극장실태조사표
07  대생좌의 흥행 분위기 : 대생좌 꼭대기에서 나팔소 리가 울린다. 구성진 가락으로 유행가가 흐른다. 분칠에 연지를 바른 극단패들이 꽹과리와 나팔을 앞장세우고 동네를 한바퀴 돈다. 극장에 극단이 들어왔다는 선전인 것이다. 극장 문앞에는 화려한 포스터가 나붙는다.「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줄타기광대 임상문」극장이 터져 나간다. 좌석제고 뭐고 없다. 이층은 신을 벗어 맡기고 올라간다. 다다미에 앉아서 구경한다.「부산 어제와 오늘, 극장」 (1962년 9월 15일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