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성영화 상영관 시대 부산흥행가는 경쟁관계를 유지해 오던 보래관, 상생관, 소화관이 1932년 부산 활동사진 상설관 동업조합을 결성하여 업계 단결력을 공고히 해 오다 1944년 들어서는 부산 영화극장이 추가로 가세하여 ‘부산영화연예조합’으로 거듭나면서 재부 일본 극장주들은 토박이 부산사람의 극장업 진출을 적극 차단하는 등 독과점 횡포를 부렸다. 극장 관람료는 1930년 대인 1원, 소인 50원, 학생 30원을 받았다. 1931년 들어 보래관, 상생관, 소화관, 유락관, 태평관, 수좌, 중앙극장 7개 극장에서는 영화 224,826명, 공연물 186,217명, 기타흥행이 92,205명으로 총 503,248명이 입장하여 부산의 극장관객 동원은 사상 처음으로 50만 명을 돌파했다.01

그러나 영화관의 관객 동원은 활동사진 상설관시대(무성영화 전성기)보다는 많은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32년 입장료는 전년도 만주사변 발발이후 정세불안으로 파격 봉사요금이라는 명분아래 상층 50전, 하층 30전으로 1933년까지 이어졌다. 부산 활동사진 상설관 동업조합의 보래관 관주는 1932년 12월 28일 극장업계 불황에 따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입장료 개선책을 위한 담화문을 언론에 발표하면서 호소하기까지 했다.

삼가 알립니다. 전국적 불황에 따른 업계가 부진의 타개책으로 부산영화계도 「10전 균일 흥행」을 해 왔던 바 금년부터 환거래의 하락과 수입품의 폭등은 드디어 영화계 공전의 타격을 입고, 필름원판이 7배 폭등했다. 제작비의 팽창으로 우리 상설관에 부담액은 금년 여름에 비하여 약 13% 증가로 드디어 경영 유지의 곤란을 호소하는 곤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따라 종래 10전 균일의 경쟁적 흥행의 계속은 자연 「우수영화 상영불능」, 「영화오락의 저락(低落)」을 부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업자가 서로 모여 깊이 협의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영화팬 여러분의 동정에 의지하고 단연10 전흥행을 중지하고 관람 요금의 최저액을 정하고 우수작품의 공개, 내용 충실에 경쟁을 다하고, 대중 제일의 오락인 신영화 상설에 노력하고 ‘날마다’ 사랑에 보답할 결심입니다. 아무쪼록 각별이 이해해 주시어 배전에 이해와 후원을 간절히 바람니다.
소화 7년 12월 22일 부산 활동사진 상설관 동업조합 보래관 이와사끼 다께지02

1933년 역시 부산지역 영화관의 불황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1934년에도 더욱 심한 타격을 입었다. 대중요금이란 명목으로 입장료가 30전 균등화하면서 상층 40전, 하층 30전으로 전년도보다 10전이 인하되기까지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1938년 들어서는 부산 지역극장 입장료에 전시특별세를 부가 징수하기까지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은 정세 불안이 가중되자 부산흥행가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해 소화관은 43,025명이 입장, 관람료는 17,772원 70전, 상생관은 28,276명 입장, 15,040원 10전, 보래관은 32,614명 입장, 15,018원 50전으로 3개관 총 103,915명이 입장하여 관객 동원은 소화관, 보래관, 상생관 순으로 나타났다.03 반면 관람료는 총 47,831원 30전으로 소화관, 상생관, 보래관 순으로 나타나 소화관이 관객 동원과 수입면에서 1순위를 기록했다. 3개관 외에 부산극장, 대생좌, 태평관, 수좌는 120,000명이 입장하여 118,000여 원의 수익을 올려 영화관보다 배 이상의 흥행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영화, 연극 공연극장은 총 224,000여 명이 입장하여 1931년의 503,248명에 비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1940년 들어 영화관은 상층이 50~70전, 하층 40~60전을 받아 1930년대 보다는 상승세를 보였다. 1941년의 영화흥행은 보래관이 최고 성적을 올렸다. 39,997명 동원, 입장료 19,816원, 소화관은 33,000여 명 입장, 입장료는 18,000여 원, 상생관은 25,849명 입장, 입장료는 14,000여 원으로 총 98,846명 입장, 입장료는 51,816원, 태평관, 부산극장, 수좌에서는 120,000명이 관람하였다.04 1942년 상생관은 상, 하층 관계없이 55원 균일 입장료를 유지했으며 1944년 들어 영화관은 1회 1편 상영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70전을 받았다.


01 1932년 1월 20일 조선시보
02 1932년 12월 28일 부산일보
03 1940년 3월 15일 부산일보
04 1941년 10월 10일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