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건축물이 현존하는 극장, 소화관 (1931년~1968년)
✽ 극 장 명 : 소화관(昭和館: 쇼와간)
✽ 개명극장명 : 조선극장 → 동아극장
✽ 주 소 지 : 부산부 남빈정 2정목 22
✽ 현 주 소 지 : 중구 창선동 2가 47번지
✽ 개 관 일 자 : 1931년 12월 31일
✽ 폐 관 일 자 : 1968년 7월 22일
✽ 관 주 : 사꾸라바 후지오(櫻庭藤夫)

일제가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이후부터 세워지는 전국의 극장 이름에는 일왕의 연호를 사용하는 곳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울의 명치(明治)좌로부터 혜산진의 명치회관, 서울의 대정(大正)관, 흥남의 소화(昭和)관과 포항의 소화좌, 부안의 소화극장 등으로 부산에서도 소화 6년(1931년) 사꾸라바 후지오가 신축하는 새 영화관의 이름을 소화관으로 명명 개관되었다.

소화관은 광복기까지 부산 최고의 영화관으로 승승장구해오다 광복이 되면서 보래관, 상생관, 부산 영화극장과 공동으로 상금 4,000원의 현상 공모에 의해 조선극장(朝鮮劇場)으로 다시 태어났다. 1946년 1월 1일부터 불려진 조선극장은 1949년 12월 6일 동아극장(東亞劇場)으로 재개명되어 폐관 때까지 사용됐다.

소화관 탄생의 배경은 관주 사꾸라바의 사업적인 패기와 위기극복을 돌파해 나가는 그의 경영 수완의 결과였다. 그는 1930년 11월 10일 화재 사고로 하루 아침에 행관을 잃어버리자 동일 장소의 재건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조선은 물론 만주 지역까지 배급망을 갖춘 사꾸라바상회의 모관격인 행관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영화관 탄생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때였다.

새 영화관은 일본인 상권의 중심지였던 행정과 인접한 남빈정으로, 이웃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경영돼오고 있는 극장 보래관과 태평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화관은 3층 철근 콘크리트 현대식 공법으로 건축되었다. 규모 면에서도 기존의 극장들과는 차별화될 만큼 부산 최고의 자랑거리로 선보였다. 대지 164평, 3층 연 344평, 무대 25평의 소화관은 관객 수용 능력이 총좌석 861석(1932, 「부산상공안내」)에 달했다. 1층 2등석 475석(남자 135석, 여자 65석, 가족 275석), 2층 1등석 226석(남자 71석, 여자 35석, 가족 120석), 3층 3등석 160석(남자 48석, 여자 48석, 가족 64석)으로 1934년에는 1,000석, 1942~43년 1,050석, 1957년은 823석(1층 438석, 2층 190석, 3층 195석), 1959년 11월 전국극장일람표는 903석으로 각각 기록되고 있다.

소화관 역시 광복과 함께 적산극장으로 민간에 불하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은 극장으로 행정구역도 여러 차례 바뀌어졌다. 부산부 행정 2정목47-1번지(1932, 「부산상공안내」)에서 광복 후인 1946년 1월 1일(1945년 12월 25일 민주중보) 부산부 서대신정 3정목 55번지, 1949년 중구 창선동 2가 47번지로 각각 변경되었다. 대표 역시 사꾸라바 후지오 관주가 광복 후 떠나간 자리에는 1946년 1월 1일 조선극장으로 바뀌면서 대표에 이봉주(李奉柱), 같은 해 3월 10일자 민주중보는 공동대표 이현수(李鉉琇), 김행○(金行○), 이어서 3월 15일 선정된 관리인에는 화가 양달석과 연출가 신고송, 얼마 후 새 관리인에는 미 6사단, 24사단의 추천으로 임명된 장영근(張英根, 12월 5일자 예술통신), 1952년 정임환(鄭任煥), 1954년 정재환(鄭在煥), 1958년 정기호(鄭基昊), 1959년 이후 폐관 때까지는 정용환(鄭龍煥)이 대표로 경영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