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부산에 건축된 23개의 극장과 부산공회당은 모두 재부(在釜) 일본 실업인들의 자본에 의해 일본식 취향과 역사의식에 맞추어 건축되고 경영돼 왔다. 극장을 세운 일인 실력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부산 재계를 장악하고 있던 거류민 1세대의 권력자 하사마 후사타로(1860~1942)는 행좌와 행관 외에도 국제관과 유락관의 주주로 참여했으며 부산 공회당 건축때는 건립기금으로 10만 원을 기부하기까지 했다. 오이케 타다스케(1856~1930)는 부산좌와 유락관을 경영했으나 두 곳 모두 화재로 잃으면서 부산좌의 경우는 재건축을 수차례 시도하다 무산되었다. 그는 중앙극장을 건축 중 사망하자 장자 오이케 겐지가 승계했다. 상생관주 미쯔오 미네 지로오는 1936년 오이케 겐지로부터 중앙극장을 인수하여 극장명을 대생좌로 개명 후 경영하면서 경성, 대구지역에까지 진출하여 용산극장과 신흥관을 경영했다.

여관업자 마쯔이 고지로는 송정좌를 운영, 보래관은 초기에는 오노와 하이루가 그 후에는 이와사끼 다케지가 운영하다 재건축되면서 이후 부산극장을 동시에 경영했다.
동양좌는 다까시다 모리도라, 변천좌는 교야마 하나마루, 사꾸라바 후지오는 행관과 수좌를 인수하여 행관을 제1행관, 수좌를 제2행관으로 개명, 운영하다 행관이 화재로 소실되자 소화관을 신축 경영했다. 사꾸라바의 극장 경영은 광범위하여 조선의 각 지역에 10개소, 만주지역에 4개소를 포함하여 총 16개 극장을 경영하기까지 했다. 기노시다 모도지로는 국제관, 요시다 겐조는 태평관, 오가와 요시조는 부산극장, 사이조 사다도시는 대화관, 다까다 쥬이찌는 동래극장을 건축, 운영하였다. 단 아쉬움이 있다면 이들 23개의 극장 중 순 부산 자본과 우리손으로 건축되어 경영된 극장이 단 한 곳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재부 일본인 극장주들이 중심이 되어 1928년 부산 키네마협회, 1932년 부산 활동사진상설관 동업조합, 1944년 부산 영화연예조합으로 이어져간 조직 결속과 담합으로 인해 극장업이 독점되어온 나머지 순 부산 사람의 자본이 극장업에 관여할 경우, 설립이나 인수자체를 원천 무산시킨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부산지방에서 조선인 측에 1개의 활동사진관도 없음을 심히 유감으로 지내오던 바 금번 송태관(宋台觀)의 발기로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문제의 장소에 대하여 초량 방면에 택지를 선정하였다가 당 지방에는 내지인측에 경영하는 4관이 함으로 형편에 의하여 부산진 방면에 선정하였다가 동지방에도 불편함으로 동래남문 방면에 예정하였다가 동지방에도 부적당함으로 결국에는 동래온천장에 택지를 확정하고 목하 건축에 착수할 예정인데 주식의 총액은 2만5천 원으로 하고 1주에 10원 50전으로 주식을 모집하는데 1,500주는 동래온천장에서 부담하고 1,500주는 부산진 방면에서 모집하는데 경성 우미관과 연락하여 사진을 사용할 예정이라더라 (1921년 3월 24일 매일신보 : ‘부산상설관문제’)금번 부산 태평관을 부산출생인 김해득(金海得)씨가 인수하여 조선영화 상설관으로 한 후 일반인사에게 많은 환영을 받는다함은 본보에 보도된 바니와 오는 추석에는 특별히 본보독자에게만 한하여 활인하기로 되었다고 하며 당일인 음력 15일, 16일에 상영할 사진은 <아리랑> 전후편이라는데 날짜와 장소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시일 10월 6, 7양일(음력 8월 15, 16일 밤), 장소 부산공회당, 입장료 대인 50전을 40전으로 소인 30전을 20전으로 활인 (1930년 10월 2일 조선일보 : ‘본보독자우대’)

부산 상설관 문제는 초량방면에 택지를 선정했으나 내지인, 즉 일본인 경영주가 운영하던 보래관, 행관, 상생관, 국제관 4곳이 인근에 영업 중이어서 설립허가가 반려된 것으로 유추된다. 그리고 초량지역에는 1921년 12월 11일 개관을 목표로 신축 중인 유락관이 있었으므로 동일 지역권인 부산진에서 타지역으로 변경할 것을 종용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동래남문, 동래온천장 등으로 수차례 택지가 변경되면서 송태관의 극장설립은 일인 극장주들의 끊임없는 방해공작으로 인해 의지가 꺾이면서 신문보도에 그치고 만 경우였다. 본보 독자 우대 경우는 김해득이 1931년 5월 조하소, 주일, 박원심, 김수철, 김진수와 함께 발기하여 부산영화동인회를 조직 <오동나무 비애>, <뜻 깊은 도적놈>, <저버린 그곳>, <그여자의 설음>을 제작하는 등 극영화 제작운동을 주도한 부산출생의 인물14로 그가 요시다 겐죠가 경영하고 있던 연극 전용극장 태평관(1922-1943)을 인수하여 조선영화상설관으로 경영하려는 기획은 높이 살만한 일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태평관은 1943년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요시다에 의해 경영되어 왔으며 김해득의 태평관 인수는 쉽지 않았던 나머지 무산된 경우가 됐다. 두 사례에서 도출된 문제를 종합하면 그 원인은 타지역에서의 경우 지역마다 토종 자본의 극장이 세워졌으나 부산은 개항 이후 거류지를 중심으로 극장이 세워지면서 극장업 자체가 재부 일인 권력 실세들이 독점해온 나머지 조선(부산)사람의 극장설립이나 인수는 원천봉쇄되었으며 극장업 진출 자체가 무산될만큼 텃세가 심했다.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 1856~1930)

오이케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下縣郡 嚴原町에서 출생, 1875년 2월 28일 부산으로 건너와 약삭빠른 실업가로 변신하여 치부한 사람이다. 해산물 무역업을 시작으로 여관업, 미곡 및 잡화 직수입도 하고 정미공장을 설립 경영했다.
1881년 이후에는 부산거류민회 의원 및 민단의장 회의소회두, 부협의원, 일본중의원 의원 등의 공직을 역임, 부산번영회장, 부산 곡물시장 취체역, 부산 수산회사 사장 등 그외에 각 은행의 중역을 겸했으며 러일전쟁 때의 공적을 치하받아 제국 일본의 훈장을 받았다. 1928년 고관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박원표는 그가 아는 부산 사람에게 이
런 말을 들은 일이 있다고 기록을 남겼다. 어느 한국인 한 사람이 왜놈 오이케에게 돈을 빌려 썼는데 그 돈을 갚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만다. 그러자 돈을 못 받게 된 오이케는 채무자의 미망인을 불러들여 자기 창고 속에 가두었다. 그녀는 돈을 갚을 도리가 없었거니와 언제 풀려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들이 주는 밥을 일절 먹지 않고 단식으로 반항하였다. 이때 그녀는 월경이 있을 때라 온 얼굴에 피칠을 하고 있자 이를 보고 놀란 그들은 그녀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한일합병 직전 이런 일들로 인해 채무변제가 안되면 행패를 당하지 않으려고 한국인들은 집과 토지를 내주고 떠나기까지 했다.13


13 박원표 「향토부산」 태화출판사, 1967년
14 1931년 5월 23일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