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동지역 최초의 극장, 삼일극장 (1944년~2006년)
✽ 극 장 명 : 삼일극장(三一劇場)
✽ 개명극장명 : 조일영화극장 → 삼일극장 → 제일극장 → 삼일극장
✽ 주 소 지 : 부산부 범일정
✽ 현 주 소 지 : 동구 범일동 117번지
✽ 개 관 일 자 : 1944년
✽ 폐 관 일 자 : 2006년
✽ 대 표 : 미상(일본인)

재상영관으로 출범하여 만년에는 3, 4번관으로 운영되었던 연극 ・ 영화 전용극장인 삼일극장은 극장 자체가 숨은 비사를 간직한 채 추억의 극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곳이다. 광복직후 한때는 창고로 사용된 적이 있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수용소 시설로 이용되기도 했다.

삼일극장은 1966년 고 나운규의 일생을 그린 영화 <아리랑>을 찍을 당시 일제 때 서울의 단성사 모습과 흡사하여 삼일극장을 단성사로 꾸미고 나운규의 장례식 장면을 촬영했다. 최무룡 감독은 춘사의 장례식날 비가 왔으니 비가 내려 주기를 소망했으나 몇 달째 가물어 가능성은 제로 상태였다. 그런데 촬영일인 2월 16일 부슬비가 내리자 춘사의 영혼이 돌봐주었다는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 촬영이 순조롭게 끝났다. 삼일극장은 1999년 부산영상위원회의 출범과 함께 <친구>(곽경택)는 물론 <소년 천국에 가다>(윤태용), <삼거리극장>(전계수) 등의 영화 속 배경이 되어 카메라에 담기면서 <친구>의 경우는 전국 관객이 813만 명을 돌파하자 부산광역시는 범일동 구름다리에서 삼일극장까지를 ‘친구의 거리’로 선포, 촬영 명소로 널리 알려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극장자리는 폐관된 후 범일동 철길 건널목 입체교차로 진입로 공사로 편입되면서 역사의 뒤안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삼일극장의 일제시대 영업기간은 1년 남짓에 불과했으나 광복 후 폐관때까지 60여 년 동안을 범일동 일대 주민은 물론 인근에 산재했던 신발공장 등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했던 근로자들의 문화 욕구를 해소해주었던 정겨운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는 곳이다. 개관 당시 단층이었던 삼일극장은 1969년 3월 1일 개축공사에 들어가 그 해 10월 25일 3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단장되면서 무대는 15평으로 매우 협소했으나 규모는 1층 570석, 2층 179석, 입석 180석, 총 929석의 대형 극장이었다.

삼일극장은 1946년 2월 17일 (주)조일(朝日)영화극장으로 개명되면서 이사장에 이병희, 상무이사 김태동, 강만규, 재무이사 박경영, 총무이사 윤경술 체제로 경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1일부터 이병희(李秉熙), 윤경술(尹庚述) 공동대표가 극장명을 개관당시의 이름인 삼일극장으로 다시 바꾸어 경영에 들어갔으나 공동대표 체제는 보름만인 1946년 3월 15일 미 군정청에 의해 새 관리인으로 출판업에 종사했던 이병희와 극작가 김종명이 선정된다. 그러나 관리인은 곧 백지화되고 새 관리자에는 경상남도 공보과장인 홍을수의 친척이던 홍승문이 맡으면서 그는 1947년 대표직에까지 오르지만 삼일극장 역시 적산극장으로서의 잡음이 끊임없이 이어져갔다. 1948년 3월 5일 경상남도 재산관리국은 구 일본인 소유주권(4,560주)의 삼일극장에 대하여 3월 9일까지 미군정청관재청에 입찰신청 할 것을 공고20하자 홍승문의 양해로 윤경술이 극장을 인수21, 새 관리인이 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 들어가는 듯 했으나 극장 운영권을 둘러싼 권리권 쟁탈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삼일극장의 분쟁은 1949년 11월 윤경술이 임차인으로 최종 결정되면서 범일동 117의 1번지 삼일극장은 제일(第一)극장으로 개명 새롭게 출범됐다. 그러나 극장명은 1953년 삼일극장으로 다시 복원 되어 폐관 때까지 사용되었다. 삼일극장의 경영은 1960년~70년대는 윤경술, 윤병길, 정달붕, 1980년~90년대는 정영모, 정광현, 2000년 김종국대표 순으로 이어졌다.


20 1948년 3월 7일 부산일보
21 1948년 3월 9일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