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최초로 세워진 상설극장인 행좌가 등장하기 이전에 생겨났던 가설극장(假設劇場)은 일본인 전관 거류지 내에 거류민을 대상으로 연극 등의 공연을 하기 위한 극장시설이 없자 1881년 관계법령이 만들어지면서 설치, 운영되기 시작했다.

1881년 12월 15일 부산 영사관이 공표한 관계법령은 일본 거류 인민 영업규칙 제48호로서 규칙의 제1장 총칙 제1조 12항은 거류민을 위한 영업의 종류 중 제흥행, 제유기장의 업종에서 지거(芝居)와 기석(寄席)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지거란 일본의 전통 연극공연을 할 수 있는 시바이 즉, 가설극장으로 관련 세부사항 제61조는 극장, 기석, 흥행장 기타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 환자가 발생했을 때는 소독해야 한다고 영업에 따른 수칙까지 이행 하게끔 제도화하여 시행에 들어갔다. 이렇게하여 부산은 상설극장 설립의 전단계인 가설극장 운영이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가설극장의 상존을 뒷받침해 준 또 다른 기록으로는 「부산항세일반」(1905,일한창문사)으로 “극장은 2개소가 있고 해마다 여러 가지 흥행이 끊이지 않았으며 근자에는 일본인 거주지 이외에도 가설극장을 설치하여 관람시키게 되었다…(중략)…”, 1904년 부산에서 경영되고 있었던 행좌, 송정좌 두 극장에서의 흥행 외에도 가설극장 설치가 허가되어 흥행을 허가한 것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일본이 장차 조선을 강제 합병시키기 위한 책략의 하나로 일본의 대중문화를 유입시킴으로 문화적 침투를 주도면밀하게 유도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했다.

가설극장 무대에서 보여준 공연물들은 하나같이 일본에서 유입된 대중문화가 상륙해 선보였다. 예를 들면 연극장사, 연극 부연절, 죠루리 제문, 즉흥민요, 연극 옛날배우, 줄타기, 일본 씨름 스모, 마술, 비파흥행 등이었는데 이들 모두가 왜색문화 일색이었다. 부산에 이어 개항되는 인천의 경우도 개화동에 설치했던 가설극장은 인천에 극장이 없던 시절 조선의 혁신단이 가설무대일 망정 우리의 신연극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정성스럽게 무대를 꾸미려고 단원 일동이 노동자 이상으로 땀을 흘리며 공연장을 만들었다. 임성구 단장이 현장을 지휘한 이가설극장은 배경과 대도구가 없어도 연극하기에 불편이 없게 꾸며졌으며 무대가 밝게 남포등도 많이 달았다. 무대 배면은 병풍으로 벽을 대신했고 평상을 놓아서 마루도 만들었다. 일각 대문 쪽도 임시 만들어 세웠다. 객석쪽에서 무대로 통하는 화도(花道)까지도 구름다리 모양으로 두툼한 널빤지를 깔아 연극무대로서의 이목구비는 흉내를 낸 셈으로 이 가설극장의 무대 공연이 빌미가 되어 그 해 인천에서는 축항사라는 극장이 세워지게 됐다.01

가설극장의 운영은 당국에 가설극장의 흥행을 신청하여 허가받은 기간동안 허가된 장소에서만 공연을 하였으며 흥행 종료와 함께 철거되었다. 가설극장의 설치는 주로 편리하게 구성할 수 있는 천막을 사용하므로 일명 천막극장이라고도 불리웠다. 가설극장의 특징은 흥행이 될 만한 곳을 선정하여 허가 기간동안 흥행 후 이동됨으로써 이동식 극장이라는 별칭도 주어졌다. 그 외, 가설극장 운영은 극장으로 활용될 만한 창고나 많은 사람이 수용될 수 있는 건물을 임시로 단기간 빌려서 흥행을 하기도 했다. 개항 직후 생겨난 가설극장은 소멸되었으나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부산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기존의 상설극장 시설이 모자라자 가설극장이 다시 등장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천막사용이 일반적이었으나 미군이 사용하던 콘세트 막사를 가설극장의 새로운 도구로 등장시킨 것도 이 시기였다. 옛 부산역 광장에 자리했던 콘세트 막사를 개조 운영하였던 철도문화관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부산의 가설극장들은 주로 상설극장 지역을 벗어나거나 도심을 벗어난 변두리 매축지나 사람이 북적거리는 시장주변과 공터에 설치되었고 흥행을 노린 나머지 신문광고까지 등장할 정도로 편법 경영에 가속도가 붙기까지 했다.

서구 동대신동 시장 부근 가설극장에서는 5일간 국창 임방울 선생 일행의 <고전음악예술제전>이라는 광고를 싣고 있어 상설극장 못지않게 위풍 당당한 분위기를 전해 주었으며02 그 외에도 범 7동 매축지를 비롯해 위치를 알 수 없는 매축지의 대부극장 연극호 회관, 김길자 회관, PX, 광명, 보성관03, 적기극장, 서면의 통일관, 제2문화관 등의 가설극장이 상설극장처럼 당당하게 이름을 내걸고 영업을 했다. 그 외에도 경남도청 앞과 거제리, 고관 넘어가는 수정동 이면도로에서도04 가설극장 운영이 한동안 붐을 이루었다. 이들 가설극장은 휴전이 된 후 사회가 안정세에 접어들자 흥행을 목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설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불법흥행이 자행되자 사회의 지탄 대상으로 부상하면서 당국은 철퇴를 가하기 시작했다. 휴전이 성립된 이래 각 분야에 걸쳐 전반적인 부흥계획이 착착 진행됨에 따라 문화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이즈음 이와는 정반대로 도시 미관상으로나 위생적 견지에서, 또는 화재방지에서도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사례까지 부상했다. 시내 도심지 남포동 골목에 ‘뉴 아리랑’이란 카페로서 이름난 곳에 난데없는 남포영화관이라는 버젓한 간판을 붙여놓고 추석절 관객 호주머니를 털어 대폭리를 꾀하는 웃지 못할 괴처사가 있다. …‘뉴 아리랑’ 건물에 경상남도 공보과 가설극장 621호에 의거 극장이 창설 … 부산 경찰서에 지난 22일부터 4일간 <공갈자>란 영화를 상연한다는 흥행계를 제출하는 한편 동영화로 추석때 시민을 현혹케하여 일반 60환, 군경 30환씩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는데 동 건물의 내부면으로 보아 위생시설이라곤 전무할뿐더러 화재의 우려성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경남도 당국에선 무슨 의도에서 가설극장 허가를 해 준 것인지 적지 않은 의아심을 품게하고 있다. “냄새나는 가설극장, 허가해 준 도측에 의아”05 “부산시내에 버젓이 행세하고 있는 가설극장은 앞으로 그 흥행을 전적으로 금지시킬 것이라고 29일 이 경남 도지사가 엄명했다. … (중략) … 따라서 앞으로 가설극장 단속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지적되고 있는 부산시내 가설극장은 보성관, 제2문화관 2개 극장인 것이며…, ‘가설극장 흥행금지 방침’이 보도06될 만큼 사회적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가설극장에 대한 여론은 앞의 사례에서와 같이 매우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변칙적인 방법으로 다시 등장했던 시설물인 가설극장은 전쟁으로 인해 배고프고 일자리마저 없었던 서민들에게 상설극장 출입은 엄두도 못냈을만큼 어려웠던 시기, 적은 푼돈으로나마 영화나 연극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던 안식처 같은 곳이기도 했다. 특히 끊겨진 필름에 비가 줄줄 샜을망정 고달팠던 한순간을 잊을 수 있게 해주었던 꿈같은 궁전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가난과 사회적 시련기에 소시민에게 위안이 되었던 이들 가설극장은 1970년대 들어 흑백 TV가 보급되면서 소멸되어 오래전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묻혀버린 옛이야기가 돼버렸다.


01 안종화 「신극사이야기」 진문사, 1955년
02 1954년 5월 11일 부산일보
03 1955년 6월 13일 부산일보
04 이선부 전부산영화인협회 회장 고증
05 1953년 9월 25일 부산일보
06 1955년 10월 30일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