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의 영화 상영과 공연물 홍보방식은 각 극장의 정면을 장식하는 메인 간판미술이 가장 우선시 되었으며 상연물 예고를 위해 청기, 홍기를 앞세우고 꽹과리를 두드리는 광대(一名 진돈야) 일행들이 부산시내 곳곳을 떠들썩하게 돌아다니는 거리패 홍보가 성행했으나 도심내의 소음공해로 인해 한국전쟁 이후에는 사라졌다. 다음은 전단지(日名 지라시)를 뿌리거나 포스터를 부착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홍보의 우선수단이었으며 가장 보편화된 홍보방식은 신문광고를 매개로 한 관객들과의 소통을 가장 우선시했다. 신문에 게재되는 영화광고는 당시 부산에서 발행된 부산일보와 조선시보의 독자와 매우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해주었다. 활동사진 상설관인 욱관, 보래관, 행관, 상생관, 국제관, 소화관, 부산극장 등에서는 신작 영화 광고가 매일 보도되었으나 1930년대 들어서는 2번관인 수좌, 대생좌, 대화관도 일일광고에 동참했다. 가부끼좌의 대표 극장인 부산좌, 태평관, 국제관, 부산극장은 공연 때마다 안내광고가 실렸다. 신문광고의 특징은 영화 제목과 극장명을 큰 활자체로 돋보이게 했다. 다음은 배우 이름과 제작국, 카피 내용을 작은 활자체로 나타내는 활자 중심의 일반적인 형식으로 시작됐다.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은 1916년 미국의 인기 연속활극물인 <명금〉이 상영되면서 광고 주변을 작은 원 형태로 둘러 시선을 끌게 끔 시도했다. 이어 외국영화 〈전화(戰禍)〉의 경우는 전면광고를 게재하면서 영화홍보에서 신문광고의 비중이 차츰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1921년 이탈리아 사극영화 〈쿼봐디스>의 경우는 원형 경기장에 사자가 득실거리는 극적인 스틸장면을 보여줌으로 활자체 위주에서 관객의 감성충동을 유발케하는 등 한 단계 진일보해갔다. 그후 신문매체의 광고형식은 끊임없이 변화를 주었다. 그 외에도 특정 제품과 연계된 영화홍보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1917년 조선연초 주식회사는 활동사진 상설관인 상생관과 제휴하여 신제품 담배광고를 보도하였으며 이후 치약, 주류, 화장품, 은단 등의 제조회사들과 극장들은 지속적으로 윈윈하는 판촉 상생 광고를 게재했다.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1860~1942)

하사마는 일본 와카야마현(和歌山縣) 那賀郡 池田村에서 출생, 오사카 오백정 상점에 취직하여 1880년 5월 부산지점 지배인으로 부임 정착하면서 무역업을 시작으로 조선의 각 지역에 많은 토지와 가옥을 인수 소유하며 부동산 경영을 본업으로 하였다. 그는 오이케 등과 함께 초창기에 부두를 축조하는데 관여, 최전성기엔 부산항 수출입 총 무역고의 2할 5분을 차지했다.

1907년 이래 거류민단의원, 부산상업회의소 의원, 부협의원, 경상남도 도의원 등의 공직을 거쳐 부산 상업은행의 은행장, 부산 공동창고회사장, 부산 수산회사, 경남은행 등의 각 취제역을 역임, 1906년 4월 러일전쟁 때는 그의 공적을 치하하는 제국 일본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30년 부산시 공과금납부 1위에 하사마, 2위 가시이 겐타로, 3위 오이케 순으로 하사마가 이와 같이 치부하여 부산의 실권을 쥐게 된 경위에 대하여 당시 일본인 이노우에 기요마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부산개항 당시에 이들 3대 재벌들은 단신 빈손으로 건너와서 어리석은 한국인들에게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기한이 되어 돈을 갚지 못하면 곧 저당된 땅을 빼앗아 버렸다. 또 한국 군수를 농락하여 이권을 획득하고 한국정부 납세 보관금을 한군에서 6~7만에서 12만원까지 여러 군의 것을 지정받아 수십만 원의 공금을 무이자로 내어 고리대자금, 미곡 자금에 유용하였다. 이렇게 이익을 취하면서 막대한 수송 요금까지 편취했다. 그밖에 특산물의 판매권, 해운과 어장의 이권을 얻어서 거부가 되었고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기회를 악용해서 부산 산업계를 그들이 독점해갔다.12


12 박원표 「개항 90년」 태화출판사, 19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