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에 세워진 두 번째 극장, 수좌 (1924년~1990년)
✽ 극 장 명 : 수좌(壽座: 고도부키자)
✽ 개명극장명 : 제2행관 → 수좌 → 항구극장
✽ 주 소 지 : 부산부 목도 영선정 195
✽ 현 주 소 지 : 영도구 남항동1가 51번지
✽ 개 관 일 자 : 1924년 2월
✽ 폐 관 일 자 : 1990년 11월 13일
✽ 좌 주 : 미상

극장 수좌는 질자좌(1912년?~1918년?) 이래 목도(牧島: 영도)에 두 번째 세워진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1990년 폐관되기까지는 일제강점기 21년간, 광복 이후 45년간 총 66년간 2, 3번 관으로 상존했다. 극장명은 수좌로 개관된 후 1926년 사꾸라바 후지오가 임대하여 제2행관(第二幸館)으로 개명되어 경영됐으나 수좌로 다시 복원된 후 해방을 맞으면서 1946년 항구(港口)극장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 폐관 때까지 사용되어 왔다.

오랜 기간 극장주 또한 많은 사람에 의해 바뀌어 경영되어 왔다. 최초 건축(미상) 후 사꾸라바에 이어 1932년 이케다 다다오(池田忠夫)가 1934년 부산대교가 개통되면서 부회의원이던 시라이시 우마따로(白石馬太郞)가 토키 시설을 갖추고 1935년 1월 1일부터 경영해 오다 1942년 도가(富賀四郞)가 경영 중 광복을 맞았다. 1946년 정방○, 윤은원 대표에 이어 같은 해 3월 18일 미술가 서성찬, 연예인 윤창원이 관리인으로 선정되어 운영됐다. 그 후 극장관리위원회 추천으로 새 관리인에 김화수가 임명되었으나 1959년 양정수, 그 후 성도근에 이어 1963년 서병균과 박찬수, 1970년 김상식이 대리 운영하다 1972년 박헌용, 다시 같은해 김윤암이 맡아오다 폐관되었다.

수좌는 1등석 165명, 2등석 115명, 3등석 57명 총 337명을 수용할 수있는 적은 규모의 극장이었다. 수좌가 오랫동안 영도에 자리잡게 된 것은 1934년 영도대교 개통 후 이듬해 2월 구덕운동장과 서면으로부터 전차노선이 개통되면서 영도의 종착지인 남항동 전차 종점 앞에 극장이 위치했던 연유로 극장은 영도 주민의 유일한 사랑방 역할을 해 왔던 곳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주변 대교동에 개관된 남도극장(1952)과 영도씨네마(1958), 대양극장(1962), 영선동의 명보극장(1960)이 각각 들어서면서 낙후된 극장시설은 2편 동시상영의 3번관으로 경영되었다. 개관 때의 극장 외형은 서양일본 절충식 건물이다. 일본 전통 목구조에다 외벽체 부문만 벽돌 상에 미장을 한 건물로 르네상스식 정면에 일본전환기 신건축의 절충식 구조(이형재 건축사 고증)였으나 광복 후 전면 개·보수되어 과거모습이 사라진 항구 극장의 구조는 목조 2층 건물로 건평 351평, 무대 26.8평, 허가 정원은 682명으로 운영됐다.

일제강점기 말 수좌에서는 대생좌(중앙극장 후신), 소화관과 함께 우리영화가 자주 상영되었던 극장으로 1939년 <낙화유수>(27, 이구영), <사나이>(28, 홍개명), <세동무>(28, 김영환), <개화당 이문>(32, 나운규), <그림자>(35, 나운규), <청춘부대>(38, 홍개명), 1940년 <금붕어>(27, 나운규), <방아타령>(31, 김상진), <수일과 순애>(31, 이구영), <전과자>(34, 김소봉), <7번 소통사건>(36, 나운규), <순정해협>(37, 신경균), <성황당>(39, 방한준), <국경>(39, 최인규), <낙양의 길>(27, 천한수), <약혼>(29, 김서정), <젊은이의 노래>(30, 김영환), <방아타령>(31, 김상진), <임자없는 나룻배>(32,이규환), <밝아오는 인생>(33, 이규환), <청춘의 십자로>(34, 안종화), <춘풍>(35, 박기채), <무화과>(35, 나운규), <은하에 흐르는 정열>(35, 안종화) 등이 상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