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9월 6일 미국의 워너 브러더스 영화사가 연구, 개발하여 첫선을 보인 토키(발성)영화 <재즈싱어>는 영화기술 발달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영화가 말(소리)을 하기 시작한 그날로부터 2년이 채 안 되는 1929년 7월 18일 부산에서는 마키노프로덕션이 제작한 제1회 발성영화 <돌아오는 다리>가 행관(1915년~1930년)에서 상영되면서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아사히신문 남조선판은 “눈과 귀를 황홀하게 하는 선명함을 나타낸 마키노식 일본 토키영화 상영은 조선에서 처음 시도되어 팬들은 굉장한 흥미를 갖고 …” 라고 그 경이로움을 보도했다. 비록 우리 손으로 만든 영화는 아니었지만 부산은 발성영화를 가장 빠르게 피부로 느껴보는 시대를 맞았다. 행관에서 발성영화가 첫 상영된 후 1년이 지난 1930년 7월 23일 부산 공회당, 7월 26일 보래관에서는 닛카츠 제작 발성영화 제1회작 <고향>이 두번째로 상영되었다. 경쟁 관계의 상생관은 다소 늦은 1932년 2월 12일 쇼치쿠키네마 가마다(蒲田)촬영소가 만든 제1회작 <마담과 마누라>를, 같은해 4월 1일 쇼치쿠 제2회작 <젊은 날의 감격>을 상영하면서 초기에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발성 영화가 주로 공개되었다. 외국 영화는 다소 늦은 1932년 6월 24일 마리네 데트리히 주연의 미국영화 <상해특급>이 소화관에서 처음 상영되었으며, 경성촬영소가 제작한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 감독, 이필우 녹음)은 1935년 10월 4일 단성사에서 개봉 후 2개월 20일만인 1936년 1월 24일 소화관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발성영화 관의 활성화는 요원하기만 했다. 극장 설비는 물론 작품 수급, 변사들의 실업문제 등이 제기되면서 무성영화와 발성영화가 동시에 공존하는 시대가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렇게 발성영화의 정착화가 느슨하게 진척되는 과정에서는 과거 무성영화시대에서 히트친 외국영화 <동도>(東道), <노틀담의 꼽추>, <벤허>, <돈큐> 등이 소리를 집어 넣은 발성판 필름으로 재수입되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는 활동사진 상설관 시대(1914년~1928년) 이후 발성영화가 처음 상영된 1929년부터 1945년 광복기까지의 시기로 일제강점기 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지고 암울했던 전쟁 말기였다. 이 시기에 부산 지역에 상존했던 극장은 발성영화관을 선도해 나간 행관을 비롯하여 보래관, 상생관, 국제관, 유락관, 태평관, 수좌 등 기존 의 7개 극장과 1930년 신축된 초량정(초량동)의 중앙극장, 1931년 남빈정(창선동)의 소화관, 1934년 서정(남포동)의 부산극장, 1939년? 동래군 구
포면(구포동)의 구포극장, 1942년 수정정(수정동)의 대화관, 1944년 범일정(범일동)의 삼일극장과 수안정(수안동)의 동래극장이 각각 개관되어 총14개 극장이 상존했었다. 지역별로 보면 중구에 보래관, 행관, 상생관, 국제관, 태평관, 소화관, 부산극장 7개소, 동구에는 유락관, 중앙극장, 대화관, 삼일극장 4개소, 영도구의 수좌, 동래구의 동래극장, 북구의 구포극장이 각 1개 극장이 상존하여 초기와 활동사진 상설관 시대를 비교하면 지역별로는 매우 고른 분포를 하고 있어 시민을 위한 극장 문화가 평준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29년 국제관을 시작으로 1930년 행관, 1932년 유락관, 1943년 태평관이 각각 화재사고로 폐관되면서 광복을 맞았을 때는 보래관, 상생관, 소화관, 부산극장, 중앙극장, 대화관, 삼일극장, 수좌, 동래극장, 구포극장 10개소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