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대거 유입되는 부산은 빠르게 인구증가세가 진행되어가자 부산 극장가는 극장 부족으로 인해 가설극장이 재등장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어 갔다. 11개의 상설극장 중 문화극장은 미군정기에 이어 다시 미군 전용극장으로 이용되면서 10개소의 극장이 경영되어 오던 중 1952년 영도구 대교로에 750석의 남도(南都)극장이 개관되면서, 이후 신설극장은 해마다 증가세를 보였다. 1953년 충무동(남포동)의 남포(南浦)영화관 1개소, 1954년에는 서구 부용동의 영남(嶺南)극장과 초장동의 명성(明星)극장, 충무동의 광명(光明)극장, 중동의 해운대(海雲臺)극장 등 4개소, 1955년 초량동의 제2문화관(第二文化館), 광복동의 세기(世紀)뉴스관과 자유(自由)극장, 남포동의 보림(寶林)영화관, 중앙동의 현대(現代)극장 등 5개소, 1956년 중앙동의 국제(國祭)극장, 광복동의 미화관(美花館), 범일동의 금성(金星)극장, 양정동의 평화(平和)극장 등 4개소, 1957년 들어서는 부전동의 동보(東寶)극장, 당감동의 반도(半島)극장, 온천동의 온천(溫泉)극장, 수정동의 수정(水晶)극장, 범일동의 태평(太平)극장, 충무동의 용사회관(勇士會館→大映劇場)과 제일(第一)극장, 중앙동의 부일(釜日)시네마, 부평동의 대동(大東)극장, 충무동의 충무(忠武)극장, 대창동의 중앙(中央)영화관 등 무려 11개소의 극장이 개관됐다. 1958년도 초량동의 대도(大都)극장과 초량(草梁)극장, 대교동의 영도(影島)시네마 3개관, 1959년 범일동의 삼성(三星)극장 1개소로 1950년대 부산 극장가는 총 30개소의 많은 극장이 세워져 1959년 현재 부산지역 소재 극장은 총 40개소에 달했다. 그 중 1955년 개관을 본 1,265석의 현대극장을 시작으로 국제극장(1,233석), 제일극장(1,504석), 대영극장(1,046석)이 연이어 개관되면서 부산 극장가는 한국전쟁 이후 중구 지역을 중심으로 대형 영화관이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으며 급변해 가기 시작했다.

특히 중앙동 시대를 선도해간 현대극장과 국제극장은 외화개봉 전문관으로, 제일극장과 대영극장은 부산극장과 함께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반면 광복 후에도 일제강점기의 흥행 바톤을 이어받았던 부산극장, 시민관(상생관 후신), 동아극장(소화관 후신)이 자웅을 겨루었던 개봉관 지형도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극장가의 흥행 환경도 흑백 보통화면 시대에서 컬러 대형 스크린 시대로의 기술적인 전환기를 맞던 때였다.

1955년 입체영화 <타이콘데로가의 요새> 상영에 이어 화제의 시네마스코프 제1작 <성의>가 동아극장에서 개봉되어, 1주 상영이 관례였던 시절 <성의>는 3주간 상영되면서 흥행에 성공하자 <원탁의 기사>, <은배>, <7인의 신부> 등의 신작 시네마스코프 영화가 속속 공개되었다. 우리영화도 1958년 이강천 감독의 <생명>이 제작되어 부산극장에서 상영되었다. 1957년에는 최고 시설을 자랑하던 현대극장과 국제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가 지각 개봉돼 그해 외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당시 부산에는 부산 영화예술 연구회, 영화연극 동호회, 부산 영화평론가 협회, 교육영화 감상회, 부산대학교 영화연구회 등의 모임이 생겨나 합평회, 세미나, 한국영화 추천, 우수영화 베스트텐을 선정 발표해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확산시켜가던 중 부산 영화평론가 협회의 박두석, 허창, 장갑상 등을 중심으로 1958년 3월 27일 지방 최초로 부산일보사 주최 부일영화상이 제정, 제1회 수상식이 국제극장에서 개최되면서 부산 국제영화제 탄생 이전 시대에 이미 부산은 영화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