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극장 시대 (1949년~1968년)
주식회사 동아극장은 활동사진 및 연극 기타 일절, 영화 및 영사기 제조, 판매 그리고 앞의 항목 외에 부속된 사업을 목적으로 자본금 50,000,000원을 출자하여 1949년 12월 6일 출범을 보았다.
미국 유니버셜사 제작 디아나 다빈 주연의 <방년의 봄>과 소극장 새집의 토인비극 <추장의 딸> 2편 상연을 시작으로 <황원의 승리자>, <부루스의 탄생>, <타잔신모험>, <뉴문>, <의혹의 애정> 등이 상영되면서 조선극장 시대를 잇는 외화 개봉관으로 자리잡아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산 흥행가의 구도는 동아극장을 중심으로 부산극장과 부민관이 경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 문화극장은 미군 전용극장으로 사용되면서 극장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가운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우리영화가 부진을 면치 못한 나머지 빈자리는 다시 연극 공연물들이 자리했다. 한국영화 상영은 1949년작 <애국자의 아들>, <심판자>, <여성일기>가 재상영되거나 때지난 <밝아가는 인생>(1933), <인생항로>(1937), <제주섬의 새아침>이 상영되었을뿐 외화는 <부로드웨이 청춘>, <사형수> 등 35편을 상영하면서 강세를 보였다. 1951~53년에는 한국영화가 단 1편도 상영되지 못했으나 외화는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여 1951년 <미녀와 야수>, <마농> 10편, 1952년 <루이브라스>, <분홍신> 등 23편, 1953년 <리오 그란데>, <애인 쥬리엣> 등 33편, 1954년에는 우리영화 <아리랑>(이강천), <출격명령>(홍성기) 2편이 상영된 반면 외화는 <삼손과 델리라>, <제3의 사나이> 등 35편이 개봉됐다.
1955년 한국영화는 <춘향전>(이규환), <꿈>(신상옥), <운명의 손>(한형모), <고향의 노래>(윤봉춘), <죽엄의 상자>(김기영), <자유전선>(김홍), <구원의 애정>(민경식), <열애>(홍성기), <막난이비사>(김성민) 9편, 외화는 <비는 사랑을 타고>, <나이아가라> 등 45편으로 전년대비 10편이 증가되었다. 1956년에는 <처녀별>(윤봉춘), <자유부인>(한형모), <애인>(홍성기), <논개>(윤봉춘), <백치아다다>(이강천), <애정파도>(문화성) 6편, 외화는 <웨스트포인트>, <나의 청춘 마리안느> 등 38편이 상영되었다. 1957년은 <숙영낭자전>(신현호), <대춘향전>(김향), <시집가는날>(이병일), <여성의적>(김한일), <전후파>(조정호), <김삿갓>(이만흥), <잊을 수 없는 사람들>(유재원) 7편, 외화는 <백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 28편, 1958년은 <봄은 다시 오려나>(이만흥), <인걸 홍길동>(김일해), <사랑의 길>(장황연) 3편에 불과했으나 외화는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싱고아라> 등 47편, 1959년은 <소낙비>(이경식), <72호의 죄수>(김을백) 상영에 그쳤으나 외화는 <괴인 드라큐라>, <쟈바의 태풍> 33편이 상영되었다.
1950년대 동아극장의 흥행은 한국영화 상영이 총 29편으로 총제작편수 307편의 9%에 불과했으나, 외국영화 상영은 1,130편 중 327편이 개봉돼 전체의 34%를 차지하면서 외화 상영관의 강자로 군림했었다. 동아극장이 외화 상영관으로 호경기를 누리고 있던 1951년 9월 8일 프랑스 영화 <마농>이 상영되었던 현장을 9월 11일자 부산일보는 꽤나 소상하게 그 분위기를 전했다.
“전열(戰列)에서 이탈(離脫)한 군상(群像)들” 극장과 요정 시장편모 <마농> 차자 세월 모르는 장사진, 동아극장과 그 부근, <마농>이라는 불란서 영화가 8일부터
동아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데 구경꾼들은 두 줄로 극장을 한바퀴 뺑돌아 춘양원 앞길까지 느러서 있었다. 군인 군속이 천여 명 여학생이 역시 천여명이다. UN사모님을 비롯한 유한매담은 그보다 좀 적은 8백여 명이고 고급으로 지은 양복쟁이가 약 5백명 청년 7백여명 그 밖에 소년들과 각종 장사치들이 약 3백명으로 가뜩이나 비좁은 극장 옆골목길은 사람의 틈을 빠져 나가기가 힘들 지경이어서 극장앞 큰 길은 사람의 홍수를 이루어 차가 사람을 비켜다니는 형편이었다. 순경은 호각만 불 뿐이지 교통정리는 커녕 오히려 사람에게 밀리는 면임으로 헌병이 7명이나 출동해서 구경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3천원씩 하는 이 영화 구경을 할려고 이와 같이 수 천의 남녀들이 할일 없이 세시간씩이나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는것이다. …(중략)
한국전쟁기의 동아극장은 외화흥행의 일번지로서 전흔의 상처로 찌든 사람들에게 <싱고아라>, <미녀와 야수>, <전원 교향악>, <망향>, <애수> 등의 2차 세계대전 전(戰前)과 전후(戰後) 만들어진 유럽영화가 유행병처럼 소개되면서 마음의 상처를 달래준 곳으로 회자될 정도의 명소였었다. 그 외에도 <미완성 교향악>, <그리운 눈동자>, <화비오라>, <쌍두의 독수리>, <북호텔>, <파르마의 승원>, <종착역>, <제3의 사나이>, <함렏>, <안나>, <천국에의 계단>, <애인 쥬리엣>, <올리버 트위스트>, <분홍신>, 미국영화 <마음의 행로>, <리오그란데>, <역마차>, <화성초특급>, <군중>, <삼손과 데릴라>, <하이눈>, <판도라>, <아파치요새>, <개선문>, <성의>, <비는 사랑을 타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메릴린 먼로 주연의 <나이아가라>,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도라오지 않는 강>,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라프소디>, <내가 마지막 본 파리>, <뽀브롬웰> 등의 신작이 모두 동아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1952년 한해 동아극장은 대중문화의 전당으로서는 온갖 잡음으로 먹칠을 뒤집어쓴 나머지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동아극장에 부정사건, 입장세 등 탈세혐의,
경찰국 수사과에서는 지난번 이래 시내 동아극장 일부 종업원들 간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입장표의 이중매도 등으로 거액의 입장세를 탈세하고 있다는 …(중략)… 26일에는 정모를 호출 방금 엄중 취조 중에 있다고 한다.(2월 28일 국제신문)
동아에 무기휴관, 부정요금 정원초과 등 자행,
도당국에서 당분간 지시있을 때 까지 휴관 시킬 것으로 결정한 직접 동기는 동아극장에서 27일부터 공연 중인 대도회 악극단의 <순정> 입장료가 4,500원 씩으로 허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000원씩 받은 까닭이라고 … (5월 1일 부산일보)
공론 : 인간 통조림 공장 동아극장 휴관령을 절찬,
극장을 마치 콩나물 공장이나 아니면 인간 통조림 공장처럼 오인함으로써 돈의 단맛에 도취한 극장 경영주에 대한 관람객의 비난은 이만저만이 아니거니와 … (5월 3일 부산일보)
동아 위생면에서도 낙제, 시내 전극장 시설조사 결과로
경남도 보건당국에서는 지난 3월 하순 시내 각 극장에 대하여 위생시설을 개선하도록 지시한 바 있거니와 …(중략)… 성적을 검사한 결과 가장 나쁜곳이 불과 20%밖에 되어있지 않은 동아극장이었다고 한다. … (5월 5일 부산일보)
학생 관람을 승인?
동아 상연 분홍신에, 자칫하면 학생풍기가 문란해지기 쉽다고 하여 지난 13일 49차 국무회의에서 중학생 이하의 극장 출입이 금지한 지금 시내 동아극장에서는 지난 18일부터 8일간 상영되는 영국영화 <분홍신> 문교부로부터 학생관람의 승인을 얻었다고 하여 일부에 말성을 일으키고 있다. … (6월 20일 부산일보)
휴전과 함께 임시수도가 환도 후 정국이 안정세를 되찾아 갈 무렵 부산 흥행가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을 맞고 있었다. 부산 인구는 1949년 47만 명에서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대거 유입되자 1955년에는 1,049,363명으로 증가되는 상황에서 수입 외화는 1952년 66편, 1953년 119편, 1954년 114편, 1955년 120편으로 매년 증가세를 보이자 공급이 수요를 못따르면서 극장 부족 현상으로 인해 가설극장이 난립, 가설극장은 또다른 사회 문제로까지 번져갔다.
그즈음 동아극장의 주변은 재상영관이 빠르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충무동 2가의 남포영화관이 1953년 등장한 후에 뒤를 이어 1954년 충무동 3가의 광명극장, 1955년 광복동 1가에 자유극장과 세기영화관, 남포동 2가의 보림영화관, 1956년 광복동 2가의 미화관, 1957년 중앙동의 부일씨네마, 부평동의 대동극장, 충무동 3가의 충무극장, 대창동의 중앙영화관 등 총 10개의 중소극장들이 개관되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1955년 들어 동일지역 권내인 중구 중앙동에 현대식으로 신축된 현대극장이 처음으로 개관
된 후 1956년 국제극장이 연이어 문을 열자 외화 상영관의 구도는 불가피하게 새로운 경쟁체제로 바뀌어 갔다. 거기에 동아극장과 이웃한 곳에는 1957년 1월 31일 대영극장과 4월 3일 제일극장이 속속 자리잡으면서 외화는 동아극장, 시민관, 현대극장, 국제극장의 4파전으로, 한국영화는 부산극장을 중심으로 대영극장, 제일극장의 3파전을 띄면서 부산의 원도심 극장가는 호황기를 맞으며 부산 극장가 일번지로 자리잡아갔다. 이 같은 시대적 흐름으로 옛 극장에 속하는 동아극장과 시민관은 시설면에 뒤지면서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며 1950년대를 마감했다.
새롭게 등장한 경쟁 극장들과의 경영에서 밀리기 시작했던 동아극장은 자구책 마련을 위해 1959년 10월 내부시설 공사에 들어가 완료 후인 1960년 1월 1일 광복극장으로 극장명을 바꾸고 이봉래 감독의 <행복한 조건>을 신장개관 특별작으로 홍보까지 했으나 취소된 후 다시 장기간의 공백기에 들어간지 8개월만인 같은 해 8월 31일 동아극장명으로 가이 윌리암스 주연의 미국영화 <쾌걸조로> 상영을 시작으로 다시 외화 개봉관으로 경영되었다. 그러나 동아극장의 1960년대 경영은 현대극장, 국제극장을 중심으
로 부활된 문화극장과 1961년 개관되는 동명극장까지 가세하면서 더 이상 지난 세월의 명성을 기약하지는 못했으나 남포동 극장가에서 동아극장의 역할은 폐관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1960년은 <BB자유부인>, <상처뿐인 영광> 등 19편, 1961년 <소매치기>, <위험함 고빗길> 등 41편, 1962년 <현금에 손대지 마라>, <아파트의 열쇠를 빌려줍니다> 등 24편, 1963년 <6년만의 의혹>, <뜨거운 것이 좋아> 등 39편, 1964년 <살며시 안아주세요>, <장열 633> 등 33편, 1965년 <제로지대>, <피와 장미> 등 37편, 1966년 <SOS일촉측발>, <속 황야의 무법자> 등 28편, 1967년 <마르코폴로>, <황야의 은화일불> 등 21편의 외화가
상영되었다. 그러나 1966년까지 한국 영화 수급이 제로였던 동아극장은 1967년 들어 <지명수배>(안영로), <기분파 아가씨>(김응천), 심우섭의 <제3의청춘>과 <처녀귀신>, <고별>(고영남), <관광열차>(김귀섭) 7편이 상영된 후 1968년 들어서는 외화가 <스윙거>, <백만불짜리 사나이> 단 2편이 상영됐을 뿐 외화의 빈자리에는 우리 영화가 상영되었다. <여왕벌>(김수동), <카인의 후예>(유현목), <나무들 비탈에 서다>(조하원) 등 총 21편의 한국영화가 개봉됐으나 폐관 직전에는 해묵은 필름 <이별의 부산정거장 >(1961, 엄심호), <검은꽃잎이 질 때>(1963, 강범구), <남과 북>(1965, 김기덕)을 끝으로 부산 최고의 영화관으로 그 역사와 권위를 자랑해 오던 동아극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하게 퇴장해야만 했다. 60년대 동아극장은 인근 극장들과의 지리적인 잇점을 살려 동시개봉으로 흥행작을 수급, 안정적으로 운영해 나가기도 했다.
현대극장과는 <우정있는 설복>, <OK목장의 결투>,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이유없는 반항>, <리차드 3세>, <해저 2만리>, <애정이 꽃피는 나무>, <대제의 밀사>, <젊은 사자들>, <샤레이드>, <판토마 위기탈출>, 국제극장과는 <론리맨>, <스지윙의 세계>, <영광에의 탈출>, <우리 생애 최고의해> 등의 화제작들을 상영하여 좋은 호평을 얻으면서 1965년 들어서는 서면지역 재상영관인 북성극장과도 동시 개봉에 들어갔다. <세라자드>, <리오콘쵸스>, <침략전선>, <비밀 대전쟁>, <용장로모로>, <국제첩보국 1급비밀>, <단디소령>, <알바레스케리> 등이 상영되면서 동시개봉 시스템은 그 후 문화 → 국제, 문화 → 현대, 문화 → 동명, 문화 → 북성, 문화 → 중앙, 현대 → 북성, 현대 → 태화, 동명 → 국제, 동명 → 동보극장 간에 이루어지면서 원도심의 독점개봉은 서면지역과의 윈윈 으로 부산 흥행가의 지형도에 변화를 모색해 가기 시작했다. 폐관된 동아극장의 건물은 동아데파트로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데파트 2층에는 1982년 12월 15일 160석 짜리 소극장 대아극장(동아극장으로 재개명)이 입점하여 부산지역 소극장 시대의 선두주자가 됐으나 소극장이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1993년 폐관되었다. 현재 극장 건물은 일제 때 건축된 당시의 뼈대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곳으로 2015년 현재 건축된지 84년을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