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출입이 자유로웠던 극장, 유락관 (1921년~1932년)
조선인 출입이 자유로웠던 극장, 유락관 (1921년~1932년)
✽ 극 장 명 : 유락관(遊樂館: 유라구간)
✽ 주 소 지 : 부산부 좌천정 206 / 동구 좌천동
✽ 개관일자 : 1921년 12월 11일
✽ 폐관일자 : 1932년 1월 2일 화재로 소실
✽ 관 주 :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
유락관은 초량좌(1914년?~1917년?)에 이어 동구지역에 두 번째 세워진 연극, 영화를 상연하는 극장으로 개관됐다. 유락관은 부산흥산(釜山興産) 주식회사가 자본금 150,000원, 불입금 37,500원을 출자하여 건축되었다.15 부산좌 대표 오이케 타다스케가 총주식 3,000주(115명) 중 1,280주를 보유한 대주주였으며 행관 관주 하사마 후사타로도 소액주주(100주)로 참여했다. 불입금은 1927년 52,500원으로 증액16되어 경영됐다.
극장 유락관은 기존의 부산좌, 보래관, 행관, 상생관, 국제관과 함께 뒤를 이어 개관되는 태평관, 수좌, 중앙극장, 소화관과 상존했으나 개관 10년만인 1932년 화재사고로 폐관되는 불운을 맞았다. 유락관의 무대에서는 <아리랑>(1926)의 여주인공으로 유명세를 탔던 신일선의 가극이 공연되는 등 조선인의 출입이 자유로웠던 곳으로 연속활극 <명금>이 재상영되었을 때는 서울에서 활동 중인 부산 동래 출신의 변사 서상호를 모셔와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1922년~1923년 유락관의 무대 위에서는 우리 연극과 영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자주 소개되었다.
청년회 활동사진, 지난 12월 29일 밤 부산청년회 주최와 본보 부산지국 및 기타 각 단체의 후원으로 구미대모험사진을 유락관에서 개최하야 당지 최천택군의 희
극을 겸하야 일반인사의 유쾌흥감을 흥하얏더라 (1923년 1월 2일 조선일보)
“1923년 3월 6일 부산여자청년회는 부산진 유락관에서 연극을 흥행하였는데 관중은 정각전부터 운집하여 만장의 성황을 이루었으며 회장 박덕술 양의 개회사를 위시하여 순서대로 각종 연극을 행하여 갈채를 받았다.” (3월 17일 동아일보)
1923년 5월 5일 부산지방을 배경으로 촬영된 위생선전 활동사진회가 오후 1시 유락관에서 일반에 상영됐다.(5월 6일 조선일보)
1923년 8월 3일 부산청년회, 부산진 기독청년회, 조선일보 부산지국 후원으로 교남(嶠南)학우회 순회연극이 부산진 유락관에서 상연됐다. (8월 7일 조선일보)
1923년 12월 17일 하오 8시부터 조선여자교육협회 순회극단일행이 부산 유락관에서 신극, 무도, 합창 등을 흥행하였는데 … (12월 22일 동아일보)
유락관은 관주 오이케가 1930년 사망하자 경응의숙대학 이재과에 재학중인 장남 오이케 겐지(大池源二, 1892~?)가 부친의 사업을 승계받아 경영했으며 그는 유락관 외에도 건축 중이던 중앙극장을 완공 경영했다. 그 외 대지회조점 사장, 남조선자동차(주) 사장, 조선기선(주) 취체역, 원산수산(주) 사장, 조선아 비산광업(주) 사장 등을 역임했다.
15 「조선은행회사요록」 동아경제시보사, 1925년
16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동아경제시보사, 192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