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이 협정된 후 임시수도가 환도하면서 부민관은 1953년 9월 22일 시민관(市民館)으로 개명 후 알프렛 히치콕 감독의 <암굴의 야수> 상영을 시작으로 새로운 시민관시대를 열어갔다. 그러나 시민관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동아극장과 함께 외국영화를 독점 상영하면서 1954년에는 <황혼>을 비롯하여 <세기의 제전>, <말타의 비보>, <비밀공로>, <남국의 애수>, <뽐바소년 타잔>, <풍운의 기사>, <권총왕래>, <브레이크의 모험>, <폐허 의군도>, <전투기 공격>, <역마부>, <뇌운>, <카브리의 해적>, <원폭하의 아메리카>, <사하라전차대>, <파리급행>, <아리조나의 결투>, <결투의 단애>, <풍설>, <쿠퍼의 무숙자>, <쌍아롯테>, <바다의 정열>, <후랑켄슈타인의 유령>, <남성도시>, <푸른수염>, <격전지>, <창공에 사랑을 싣고>, <성처녀>, <타잔과 인어>, <애정의 맹서>, <시저와 크레오파트라>, <왕자와 처녀>, <백장미의 수기>, <심야의 탈주>, <안나 카레니나>, <아파치족의 최후>, <신밧드의 모험> 등 39편이 상영되었다. 1955년 들어서는 <성의>, <흑기사>, <내일이면 늦으리>,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형제는 용감하였다>, <푸른베일>, <쥬리아스 씨자>, <쿼봐디스>, <로미오와 쥬리엩>, <사막의 화원>, <우주전쟁>, <진주>, <상급생의 침실>, <황금마차> 등 48편이 상영되어 동아극장 45편, 부산극장 19편, 현대극장 1편 상영으로 시민관은 최고의 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1956년부터는 사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1955년 12월 25일 현대식 공법으로 건축, 개관을 본 1,265석을 자랑하는 현대극장과 1956년 11월 3일 개관된 1,233석의 국제극장의 등장으로 이미 예견은 되었으나 시민관으로서는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해는 <황혼의 여심>, <정복의 길>, <행운>, <웨스트포인트>, <해당화>, <쾌걸다루도> 등 25편이 개봉되어 전년대비 절반으로 급감했다.

1957년은 <분노의 강>, <내일 없는 우정> 등 7편, 1958년은 <킹 소로몬>, <독재자 히틀러> 등 5편, 1959년은 <로마 정복군> 등 2편, 1960년은 <녹색의 장원>, <인공위성 X호> 등 10편 상영을 끝으로 시민관은 재상영관으로 밀려나면서 상생관 시대로부터의 명성은 옛 일이 되어 버렸다. 상생관 시절 805명 입장 정원의 규모에 비해 1957년 613석, 1959년 616석, 1963년 542석, 1975년 407석, 1976년 305석으로 감축 경영되어 온 시민관은 1954년 최해도가 인수 경영하다 부흥상사 대표 최병혁, 최병덕, 이성환이 시와 임대차 계약으로 운영돼왔으나 1958년 최병호, 최종수, 1959년 박종수, 1960년 김태경, 1963년 배종익, 1968년 배현식, 1975년 배주현으로 대표 교체가 빈번하게 이어오다 1976년 개관 60년만에 폐관되는 아픔을 맞이했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아온 부산시민들에게는 부민관과 시민관시대의 추억만큼은 잊혀지지 않는 공간으로 회자되고 있다. 폐관 후 철거된 자리에는 한국투자신탁증권 부산지점이 신축되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