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만의 항해가 시작된 첫해인 1959년 부산극장은 홍성기 감독의 <자나깨나>, <비극은 없다>부터 박종호의 <비오는 날의 3시>, 백호빈의 <꿈이여 다시 한번>, 김묵의 <나는 고발한다>, 유진식의 <대원군과 민비> 등 49편을 상영하여 그 해 우리영화 제작 편수 111편의 44.1%를 차지하면서 지방에서는 우리영화 상영 최고의 극장으로 등장했다. 그 해 문교부는 한국영화발전을 위한 보상특혜조치로 ‘한국영화 장려 및 영화오락 순화를 위한 보상 특혜 실시’를 제정, 공표하면서 소강상태의 우리 영화제작계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해였다. 이어서 1960년은 김묵의 <피 묻은 대결>, 권영순의 <양지를 찾아서> 등 39편, 1961년은 정창화의 <지평선>, 김기덕의 <5인의 해병> 등 42편, 1962년 김화랑의 <천하일색 양귀비>, 임권택의 <전쟁과 노인> 등 37편, 1963년 이용민의 <지옥문>, 이만희의 <열두 냥짜리 인생> 등 37편, 1964년 김영식의 <판문점>, 김수용의 <학생부부> 등 33편, 1965년 홍성기의 <대석굴암>, 홍은원의 <오해가 남긴 것> 등 36편, 1966년 장일호의 <국제간첩>, 정진우의 <하숙생> 등 35편, 1967년 정창화의 <순간은 영원히>, 신상옥의 <다정불심> 등 38편, 1968년 정진우의 <폭로>,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 등 38편, 1969년 권녕순의 <비호>, 최인현의 <춘 원 이광수> 등 46편, 1970년 전조명의 <신검마검>, 주동진의 <마님> 등 45편, 1971년 김묵의 <8악당>, 유현목의 <분례기> 등 41편, 1972년 신상옥의 <평양폭격대>, 정창화의 <철인> 등 31편이 부산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이와 같이 14년 동안 부산극장은 총 541편의 한국영화를 고집스럽게 상영했다. 새 영화의 흥행기간이 평균 1주일이 고작이던 때 연간 38.6편, 편당 평균 9.45일간 상영되었다. 만원사례를 알린 우리 영화는 2주 이상 상영이 보통이었으며 흥행이 부진한 외국영화 상영관들은 부산극장을 부러움의 대상으로 보기까지 했던 때가 이 시기였다. 그러나 한국영화 상영에 올인하던 부산극장도 TV의 등장과 함께 우리 영화계가 겪는 극심한 불황에 직면하면서 변화에 대처해 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 부산지역 영화관의 관객 동원수는 전년 대비 17.8% 감소를 시작으로 1971년 13%, 1972년 11.9% 경감되기 시작하자 부산극장의 경영도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그 타개책으로 1973년 홍콩영화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을 유치 상영하면서 한국영화 전용관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시기 부산극장과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대결 구도를 같이 했던 곳은 1957년 동양 최고를 자랑하는 시설을 갖추고 등장했던 제일극장으로 제일극장은 이웃에 나란히 위치했던 극장이다. 제일극장은 미국영화 밥 호프 주연의 희극물 <요절 쌍권총의 아들>을 개관작으로 그 해 외화 25편, 1958년 23편, 1959년 7편, 1961년 5편을 상영한 이후인 1962년부터 1971년까지 11년 동안 한국영화만을 고집했던 제2의 한국영화 전용관이었다. 그러나 위치상으로 이웃하고 있던 제일극장과의 관계는 라이벌로 성장해가며 공생하는 관계가 유지되어 갔다.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영화계는 성장기(1954년~1957년)를 지나 중흥기(1958년~1964년)를 시작으로 전성기(1965년~1970년)19를 보내던 당시 우리 영화제작은 급속히 증가되면서 부산지역은 대영극장과 국제극장이 한국영화 상영에 가세하였고 1969년에는 신축 개관한 국도극장과 보림극장까지 가세했다. 부산극장과 제일극장이 독과점해 오던 한국영화상영은 1970년 들어 부산극장이 45편으로 18.9%, 제일극장 38편이 16%, 두 극장이 총 34.9%를 차지한 반면 나머지 65.1%는 대영극장이 49편 20%, 국도극장 45편 18.9%, 보림극장 40편 16.8%, 기타 극장이 9.4% 상영하면서 부산지역 극장의 우리 영화 상영 시장 분포는 다변화되어 가고 있었다. 부산, 제일 두 극장은 우리영화 홍보전에서도 언제나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1959년 신정프로에서 부산극장은 <자나깨나>를 “정부수립 10주년 기념작! 신정 1일부터 당당 개봉 여러분의 부산극장”으로 안내한 반면, <3등 호텔>을 상영한 제일극장은 “새해를 맞이하여 항도팬 여러분의 행운을 빌면서 이 곳 3등 호텔에 … 초대합니다”라고 떠들썩하게 선전전을 벌였다. 그 해 구정 프로를 붙인 부산극장은 <논산훈련소에 가다>가 “특별 선물. 홀쭉이 뚱뚱이 단연 화제”, 그러나 제일극장은 <황혼의 애상>을 선보이면서 “국내 일류 인기스타를 총동원한 최고 최대의 명편 구정프로”라고 치켜 세웠다. 추석 때 부산극장은 <대원군과 민비>를 “전 시민의 추석 기분은 단연 이 한편에 총집중”이라고 강조한 반면 제일극장은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추석 흥행의 일대 승리를 확신”한다는 카피멘트로 승부수를 던지는 각축전을 벌였다. 이 외에도 두 극장의 치열한 한판승 기록
은 1961년에 벌어졌다. 홍성기의 <춘향전>을 붙인 부산극장과 신상옥의 <성춘향> 간판을 올렸던 제일극장과의 한판대결, 결과는 서울 흥행에 힘입은 <성춘향>이 완승으로 끝나면서 김지미와 최은희의 춘향전(春香戰)은 그후 부산 흥행가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두 극장의 경쟁 중 가장 인상적인 신경전은 뭐니해도 극장 전면을 간판미술로 장식하면서 기선을 제압하려는 맞불 작전이었다. 작품의 이슈가 되는 장면이나 톱스타의 얼굴을 전면에 가득 채우거나 주연배우의 모습을 나란히 부각시켜 극장 앞을 지나는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킴으로 관객을 유인하는 상술까지 동원하던 전성기가 이 시절이었다.

한국영화 전용관 시대를 이끌어 온 4인방인 오석조, 박봉갑, 김활경, 김월용은 (주)부산극장을 부산 최고의 영화관으로 자리잡게 한 원동력으로 그중 오석조 대표는 (주)부산극장 탄생신화의 산파역을 이끌어 낸 장본인이다. 그는 전무(1951년), 사장(1954년), 회장(1960년)직을 두루 수행하면서 재임기간 우수 국산영화 상영극장상인 제1, 3회 부일영화상을 받아 (주)부산극장을 한국영화 상영의 전당으로 명실공히 자리매김하는 공적을 남겼다. 그 외에도 경상남도 극장협회 회장, 전국 극장연합회 부회장,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경남지부장은 물론 남포동 1가 60번지 소재 영화배급사 대한흥업(주)를 경영 1950년~1960년대 부산 흥행가의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박봉갑은 1951년 초대 회장직을 시작으로 부사장(1954년), 사장(1960년~1973년)을 맡아 4인방 중 가장 오랜 기간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주)부산극장의 경영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킨 경영인이다. 통영 출신으로 광복이전 경찰에 근무했던 그는 1961년 경상남도 극장협회 회장, 1963년~1964년, 1967년~1973년 부산시 극장협회 회장, 전국극장연합회 부회장, 부산어업조합장, 제5대 부산상의 부회장을 지냈다. 그 외 부산 서부양조(주) 경영과 1987년 사직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한 후 재단이사장을 맡아오면서 부산교육계에도 이바지하는 등 사업수완이 매우 뛰어났으며 너그러운 인품으로 어떤 경우에도 웃으며 대했다고 지인들은 회고했다.

김활경은 부산극장의 실질적인 브레인 역할을 맡아 상무(1951년)직을 시작으로 전무(1954년), 부사장에 이어 한국영화전용관 시대의 마지막 대표(1973년~1976년)직을 수행했다. 제14~16대(1974년~1976년) 부산시 극장협회 회장, 부산경남 한국영화 배급협회 회장 외에도 중구 부평동 1가 37번지 소재에서 영화제작 및 배급사인 명보영화사를 경영했다. 김활경은 제2 상업학교를 졸업 후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정부수립 후 경상남도 관재국 부산 출장소장을 지냈다. 김월용은 초대 사장(1951년) 및 회장(1954년)직을 역임했다.


19 「한국영화총서」 한국영화진흥조합, 197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