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성 영화가 처음 상영된 행관 (1915년~1930년)
✽ 극 장 명 : 행관(幸館: 사이와이칸)
✽ 개명극장명 : 제1행관 → 행관
✽ 주 소 지 : 부산부 남빈정 2정목 14
✽ 현 주 소 지 : 중구 남포동 2가 45-1번지
✽ 개 관 일 자 : 1915년 12월 19일
✽ 폐 관 일 자 : 1930년 11월 10일 화재로 소실
✽ 관 주 :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활동사진 상설극장인 행관은 노후된 행좌(1903?~1915)를 철거 후 주변을 확충하여 총 120여 평 대지 위에 르네상스 러시아풍 일본 절충양식의 2층 현대식 극장으로 건축된 곳이다. 극장 외형의 좌우 첨탑의 분위기는 러시아풍을 연상시키며 극장 몸통은 르네상스식에 속하고 있어 이러한 유형은 양풍을 가미한 서양건축 도입시기의 일본 절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일본인들이 부산에 세운 극장 중 가장 나아 보이는 건물의 하나이다.11

행관은 관주 하사마가 건축비 12,000원을 투입하여 당대 조선이 자랑하는 최고 시설을 두루 갖춘 극장으로 신축하여 욱관, 보래관에 이어 탄생시킨 부산의 제3호 활동사진 상설극장이다. 영화관의 구조는 무대 폭이 12.7m, 무대 정면에서 스크린까지는 2.7m, 그 양쪽에는 변사의 출입구, 커튼 뒤에는 악사들이 자리하게 했다. 극장 바닥은 목재로, 객석은 4명이 앉는 의자가 여섯 줄, 한 줄에 20대씩, 후방 높은 곳에 초대석과 경관석, 그 뒤에는 영사실이, 하층은 신을 신고 화장실로 통했다. 2층은 정면과 양쪽에 좌석을 배치하고 정면 후방은 점차 높아지는 구조로 양쪽 구석에서도 무대(스크린)가 잘 보이게 설계되었다.

행관의 특징은 화장실이 각 층 양쪽에 남녀가 각각 사용할 수 있게 구분 하였으며, 화장실 악취가 객석에 유입되지 않게 하였다. 혼잡을 막기 위해서는 1층은 신을 신고, 2층은 보관하게 하였으며, 종영시 출입구 4개소를 개방하면 1,000명 가량의 관객은 10분 내 퇴장이 가능하게 했다. 편의시설로는 변사실, 매점, 음악실까지 설치하였으며, 일본과 경성, 인천 등지의 극장들을 두루 방문하여 그 장점만을 따서 건축되었다.

개관작은 일본천연색활동사진 주식회사, 하야카와(早川) 연예부 직영으로 배급된 실사물 <백군 군견의 실황>, 희극 <반일호텔>과 <루니의 인명구조>, 태서정극 전 3권짜리 <술의 죄>, 구극 전 4권짜리 <신다 기쯔네>가 주야 2회 상영됐다. 입장료는 1등석 30전, 2등석 20전, 3등석 10전, 군인, 학생, 어린이는 반액으로, 겨울철에는 동절기 관객서비스를 위해 스토브 설비가 되어있음을 강조했다.

행관의 유명세는 1916년 미국 유니버셜사의 전 50권짜리 연속활극 <명금>(名金, 1915)의 성공적 흥행으로 인해 보래관, 상생관과 함께 부산 최고의 영화관으로 자리잡아 가게 된다.

행관에서 상영된 연속활극 시리즈 중 최고 인기를 끌었던 영화는 명성(名星)이라 불리운 여주인공 루즈 롤란도를 앞세운 <록키의 루즈>, <루즈의 모험>, <저주(呪)의 독화살(毒矢)>, <복면의 여자>, <화이트이글>, <삼림여왕(森林女王)>과 육탄왕, 모험왕 타이틀이 따라 다닌 찰스 허치슨 주연의 <대선풍>, <모험의 모험>, <허리케인허치>, <호걸허치>, <스피드허치>가 최고 인기를 끌었다. 그 외에도 <검은 상자>, <제3의 눈>, <환상의 적>, <즈도라>, <마해(魔海)>, <자의복면>, <천공(天空) 괴물>, <제2세 타잔>, <전화의 소리>, <수혼(獸魂)>, <맹조(猛鳥)의 눈>, <쾌한 로로>, <電 프라이스>, <청호(靑狐)>, <독수리의 발톱>, <투쟁의 열혈>, <캄프스>, <명탐정 산더스>, <맹용 던컨>, <괴탐정 브레이크> 등이 1929년까지 상영되었으며, 연속활극 외에도 많은 화제작이 개봉되었다.

전 12권, 30,000척짜리 이탈리아 사극 <카비리아>를 비롯하여 찰리 채플린의 희극영화 <채플린의 어깨총>, <싸움>, <가짜>, <게으른 계급>, <황금광시대>, <급료일>, <개의 생활>, <서커스>, 그 외 버스터 키튼, 해롤드 로이드, 벤 터핀의 희극영화, 론 챠니, 루돌프 바렌티노, 메리 픽포드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부부, 릴리안 기쉬 등이 출연한 영화가 다양하게 상영되었다.

하사마 이후 행관을 부산 최고의 영화관으로 이끌어 간 경영주는 사꾸라바 후지오(櫻庭藤夫)로 그가 행관을 인수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배급과 극장 경영을 동시에 추진하여 성공한 사꾸라바는 1892년 2월 20일 일본 북해도의 하코다테에서 태어나 부산에는 1921년 4월 만가쯔(滿活)토지기업 주식회사 부산영업소 지배인으로 부임하면서 부산에서의 행적이 시작됐다. 1922년 행관을 인수한 사꾸라바는 1924년 7월 마키노(マキノ) 영화사와 계약, 조선과 만주 지역까지 영화상영 배급권을 체결 후 일미(日米)영화주식회사와 외국영화 공급까지 특약체결을 맺으면서 부산부 남빈정 2정목 14번지에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된 영화배급회사 사꾸라바상회(サクラバ商會)를 설립 부산 지역은 물론 조선 전 지역과 만주까지 안정적인 배급망을 구축 후 영업을 확장해 나갔다. 부산을 거점으로 한 그의 사업은 행관을 인수하여 극장명을 제1행관으로, 영도의 수좌를 임대하여 제2행관으로 바꾸어 직영체제에 들어갔다. 그는 그 후 도호영화제작소, 연합영화예술가협회, 동아키네마 주식회사와도 특약을 맺고 경성, 안동, 대련에
배급업무를 위한 출장소까지 두었다.

극장 경영은 부산 외에도, 경성의 중앙관, 평양키네마, 안동현 전기관과는 임시 대부계약관으로, 울산 방어진의 상반좌, 대구 대송관, 대전의 대전관, 목포 희락관, 군산 희소관, 이리의 이리좌, 원산의 원산극장, 해주의 해주좌, 청도의 낙락관, 대련의 제국관, 무순의 보관은 직영순업부로 계약 운영되었다.

사꾸라바의 영업활동은 다변화된 경영을 시도했다. 극장이라는 제도권 이외의 장소인 부산호텔, 초량의 철도클럽은 물론 각 신문사, 도청 등의 각 관청과 회사에까지 출장 영사업을 하여 그 영역을 넓혀갔으며 극장 경영은 보래관, 상생관보다는 시설과 서비스면에서 항상 앞서 갔다. 1927년 1월 최신식 스팀설비에 이어 1929년 7월 18일에는 부산 최초로 발성영화 상영관 시설을 갖추고 마키노 영화사가 제작한 발성영화 제1회작 <돌아오는 다리>를 상영하여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를 여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7월 16일자 조일(朝日)신문 남조선판은 “눈과 귀를 황홀하게 하는 선명함을 나타낸 마키노식 일본 토키영화 상영은 조선에서 처음 시도되어 팬들은 굉장한 흥미를 갖고…” 라고 보도하였다. 1927년 최초의 발성영화 미국의 <재즈싱어>가 나온 이후 2년만의 일이었으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만들어지기 6년 전의 일이었다.

행관이 경영되던 시기에 상존했던 극장은 기존의 부산좌, 변천좌, 동양좌, 질자좌, 욱관, 보래관, 초량좌 7개관과 그 후 개관되는 상생관, 국제관, 유락관, 태평관, 수좌, 중앙극장 6개관과 함께 공존했다. 그러나 조선 최고 를 자랑하던 행관은 보래관, 상생관과 선의의 경쟁 관계를 유지했었던 부산의 명소였으나 어이없는 화재사고로 잃고 만다. 사꾸라바상회의 지하실 영화저장소에서 처음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면서 필름 약 3,000권, 300,000원의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으면서 당국이 동일 장소의 재건축을 불허하자사꾸라바 대표는 1년 후 남빈정에 새로운 활동사진 상설관인 소화관을 신축했다.


11 이형재 건축사무소 대표 고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