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관은 연극전용극장인 변천좌(1912년?~1916년)를 미쯔오 미네지로오가 인수하여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개축하여 개관된 곳이다. 대지 95평, 1, 2층 총건평 165평으로 관객은 1층 350명, 2층 307명, 입석 148명, 총 805명이 수용되었던 영화관으로 상생관의 외형장식은 매우 독특했다. 인조석으로 조각을 부각시켜 석조건물과 같은 느낌을 주도록 표현했으며 2층 열주는 이오닉형에 가까운 주두로 적은 공사비를 투입, 석조집의 모양을 낸 당대 제일의 미장공 솜씨를 뽐낸 건물이다. 로코코와 바로크, 르네상스풍이 가미된 절충식 건물이라고 할 수 있어 이런 유형은 대청동의 근대 역사관에서 조금 찾아볼 수 있다. (이형재 건축사 무소 대표 고증)

상생관의 수용정원은 1930년, 1942년, 1943년에 805명, 1934년은 9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좌석제 정원수를 밝힌 1932년 657명에 허가되었으나 입석수 148명을 합산한 수치다. 1942년, 1943년 조선의 영화상설관목록(소화17년 영화연감)은 대표가 滿生忠雄으로 교체되어 나타나고 있다.

관주 미쯔오(1884년~?)는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영화계에서 활동 중 1913년 8월 10일 부산에 정착 후 상생관을 경영하면서 텃밭을 다진 후 1936년 오이케 겐지로부터 초량동 소재 중앙극장을 인수하여 대생좌로 극장명을 바꾸고 상생관을 모관으로 근접성이 가까운 잇점을 살려 두 극장을 동시 개봉 방식으로 경영하여 알찬 내실을 기했다. 그는 사업 영역을 대구와 서울 지역까지 넓혀 대구 신흥관과 서울 용산극장도 경영했다. 상생관의 영화공급은 1918년 닛카츠, 1923년부터는 쇼치쿠 영화를 배급받아 오던 중 닛카츠가 보래관에 넘어가는 악재가 있었으나 파테사를 비롯하여 키스튼, 메트로 등의 외국영화를 상영하여 인기를 끌었다. 상생관 역시 1917년부터 보래관, 행관과 함께 연속 활극물 상영의 독무대였다. 루스 롤란드의 탐정극 <렛드서클>, 펄 화이트 주연의 32권짜리 <철의 손톱>과 31권짜리 <암흑의 비밀>, 그 외에도 32권짜리 <비밀의 왕국>, 31권 <대타잔>, 31권 <맹수와 여신>, 40권 <판토마>, 40권 <저주의 집>, 32권 <힘이 넘치는 철완>, <죽음의 소용돌이>, <영웅키드>, <폭탄아>, <황원비밀>, <대모험왕> 등이 상영되어 오다 연속활극 시리즈물의 퇴조와 함께 1929년 찰스허치슨 주연의 대모험 맹투활극 15편 31권짜리 <스피드 허치>를 끝으로 종영됐다.

특히 상생관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가장 먼저 소개하면서 인기를 끌자 독식하다시피 상영했다. 1917년 4월 28일, 1권짜리 <채플린의 장난>을 시작으로 <권투>, <빵집>, <신문기자>, <괴잠정>, <사랑의 도피>, <연극>, 1918년 들어 <악우>, <남의 일에 질투>, <백작>, <가짜>, <지배인>, <칼멘>이 상영됐으며 그 후 <전선의 채플린>, <황금광시대>,<나무망치>, <키드>, <방랑시대>, <스케이트>, <전당포>, <데파트 성금>, <거리의 등 불>, <거리의 대장>이 상영됐다.

외국영화 중에는 1917년 촬영 1년여 제작비 200만 원, 동원인원 4만, 군마 6,000두에 함대, 비행기,잠항정이 등장하고 사상자가 1,800명이나 발생한 전 10권짜리 대작 미국영화 <시빌리제이션>, 촬영에만 5년, 제작비 1,600만 원, 등장인원 4만 5천 명, 맹수 500여 두에 릿타 죠리비에가 주연한 전 11권짜리 이탈리아 사극 <데오도라>, 그 외 미국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 <벵갈의 창기병>, <결혼의 밤>, <사나이의 적>, <킹콩>, <콩의 복수>, <묵시록의 4기사>, <신이 버린 여자>, <지배자>, <가면의 미국>, <암흑가의 얼굴>, 프랑스 영화 <탄식의 피에로>, <당근>, 독일 영화 <사선돌파>, <탈선곡마왕>, <헝가리안 광상곡>, <독가스>, <템포템포>, <폭탄난무>, <푸른 빛>, <가짜국기의 아래에서>, <승리자>, <익살왕국>, <졸업시험>, <여자의 마음>, <괴인 마부제 박사>, <물없는 바다의 전쟁>, , <최후의 중대>, <파라오의 사랑>, <베리에테> 등의 화제작이 상영됐다. 상생관에서의 발성영화 상영은 행관, 보래관보다는 다소 늦게 선보였다.

1932년 2월 12일 쇼치쿠 가마다(蒲田) 촬영소가 만든 발성영화 제1회 작품 <마담과 마누라>를 상영하면서 발성영화 상영관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시설과 관객 수용면에서 보래관, 행관보다는 열세를 금치 못했던 상생관은 소화통2정목에 새롭게 신축할 부지를 확보12했으나 실현되지 못한채 광복을 맞았다.


12 「부산안내도」 193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