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지역 최초의 극장, 초량좌 (1914년?~1917년?)
✽ 극 장 명 : 초량좌(草梁座: 소오리오자)
✽ 주 소 지 : 부산부 초량정 / 동구 초량동
✽ 개관일자 : 1914년?
✽ 폐관일자 : 1917년?
✽ 좌 주 : 미상

극장 초량좌는 오늘의 동구지역에 처음으로 세워진 연극 영화를 상연했던 극장이다. 초량좌의 위치는 1905년 1월 1일 부산~경성 간 철도가 완공되어 운행되기 시작한 경부선의 부산 종착지인 초량역 인근인 초량천 하구 옆에 소재했었다. 초량좌는 행좌 이래 생겨난 총 10개의 극장 중 영도의 질자좌를 제외하고는 모두 거류지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한일합병 이후 일인들이 득세하던 시기 초량동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이 가장 자유스럽게 출입할 수 있었던 극장이었다.

초량좌의 개관설에 대하여 1910년설이 유력하게 제기되어 왔으나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된 것은 1914년 2월 4일자 매일신보의 이기세 대표가 이끄는 신파극 유일단(唯一團) 일행인 문수성, 이웅수, 윤상희의 지방순회 공연이 초량좌의 무대에 올라 만원으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된 것과 함께 같은 해 11월 1일 발행된 「경상남도 안내」(조선시보사 발행) 제11장 내지인 주요 집단지 부산부의 ‘극장 및 기석’에서 극장 부산좌, 행좌, 동양좌, 질자좌, 욱관, 보래관, 변천좌와 함께 상존했음이 입증되었다. 1910년설의 잘못은 「부산요람」(1912, 부산상업회의소)에서도 초량좌가 나타나지 않음으로 이를 규명해 주었다. 초량좌의 기록은 그 후 부산에서 발행된 부산일보(1916년 6월 21일자, 1917년 2월 20일자), 조선시보(1916년 8월 27일자)는 물론, 1917년 4월 1일 부산 부청 발행 ‘부산부전도’상에 부산좌, 보래관, 대흑좌(동양좌가 개명된 극장), 행관, 상생관과 함께 소개되어 동시기에 경영된 극장으로 확인되었다.

초량좌가 상존했던 시기에 경영됐던 극장은 기존의 행좌, 부산좌, 변천좌, 동양좌, 질자좌, 욱관, 보래관과 공존했으며 행좌, 변천좌, 욱관이 폐관된 후 새롭게 신축개관되는 행관, 상생관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경영되던 중 초량좌는 1917년 이후의 기록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 동시기에 폐관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극장 초량좌에 대하여 ‘부산의 흥행가’(박원표「향토부산」, 1967)편은 …초량천을 사이에 두고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초량좌가 있었다. 이 극장은 한국인의 오락장소로서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던 곳이다. 개화기에 있던 서울의 연극단들이 부산에 진출하여 이곳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연극의 김도산, 김소랑의 이름이 높았다. …그밖엔 주로 일본 동경유 학생들이 주최하던 토월회가 이 곳 무대에서 그 연기를 자랑하였으니 지금 생존하고 있는 연극인으로서 변기종, 복혜숙, 이… 박노홍은 「한국극장사5」(1979) 근대 부산지역 극장에서 “…철로가 생긴 후(1905년) 초량 너머에 있는 철도역 근변에 1912년 철도영관이라는 극장이 있었던 것만 가려내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지 못하고 노인들의 증언에 따라 옛날 있었던 극장을 찾기란 힘이 들었다.” 고 각각 기술함으로 이들 기록에서 상존시기를 보면 박원표는 약 50년 전이라 기술함으로 1917년경으로 거리를 좁혔으나 박노홍은 밝히지 못하고 있다. 박원표의 기술 중 연극인 김도산은 1921년 사망함으로 그가 초량좌 무대에서 이름이 높았다는 것은 성립되지만 토월회 경우는 1922년 창립되었으므로 1921년 초량지역에 두 번째 세워진 유락관에서 공연되었다고 추정되는 부분이다.

이와 같이 극장 초량좌에 대한 기록은 폐관 후 반세기가 지난 후 증언자들의 추측성 증언으로 인해 혼선만 가중시켰을 뿐 실증적인 기록과는 많은 시각차가 있어 신빙성이 떨어지고 있다. 향후 초량좌는 개·폐관일, 일본인 경영주, 전경사진, 화재사고로 인한 폐관 검증 등이 복원 과제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