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월 23일 서면로터리 전차정류소 입구에 순 부산자본으로 세워진 최초의 북성영화(北星映畵)극장이 개관되었다. 극장 소재지는 부산진구 부전동 112번지, 대지 365평, 무대 20평, 좌석수 1층 400명, 2층 38명, 허가 정원수 570석으로 규모면에서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북성영화극장은 광복 후 처음으로 세워진 단관형 극장으로 대중문화 공간이 한 곳도 없었던 서면지역 주민들에게는 매우 각별했던 곳이다. 북성영화극장은 서면의 토지 재벌로 소문난 문두광이 개관 전일 그 소식을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항도 부산의 북부 서면 일대는 공업생산 지대로써 금후 ◦익 발전의◦◦◦◦ 일반의 문화◦◦의 입지에서 건전한 대중적 오락◦◦◦설치 ◦ ◦◦◦◦는 ◦로와 난관을 극복하고 서면 일각에 북성 영화극장을 신축한 이 금반 준공 되었음으로 건전한 우리 민족문화의 적극적 선양과 향상에 이바지하는 ◦◦을 격◦하사◦ 열의로서 ◦◦왕림 하시와 ◦◦목적 달성에 ◦◦ 성원하야 주시기를 ◦◦절망하나이다.” (1947년 1월 22일, 민주중보)

재개봉관으로 출범한 북성영화극장은 그 후 북성극장으로 이름이 바뀐 후 극장 대표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설립자 문두광의 뒤를 이어 이흥기, 문두광, 송금조가 각각 경영하여 오다 1968년 이후 김태환이 임대 운영 중 매매 되면서 극장은 28년만인 1975년 4월 1일 폐관됐다.

북성극장이 서면 중심부에 자리한지 10년만인 1957년 동일지역 내인 부전동에 동보극장 개관을 시작으로 1961년 태평시네마, 1962년 태화극장과 이성극장, 노동회관극장, 1970년 대한극장이 잇달아 들어섰다. 인근 지역인 양정동에는 1956년 평화극장과 1968년 신도극장, 1957년 당감동의 반도극장, 1969년 가야동의 대명극장이 차례로 세워지면서 이후 부산 극장가의 지형도는 중구 남포동과 북성극장을 중심으로 한 서면 지역으로 이원화 현상이 서서히 형성되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서면 지역 중심에 있던 북성극장의 역할은 남포동의 동아극장, 문화극장, 현대극장 등과 연대하여 동시개봉 시대를 열어가면서 서면 지역 극장문화권을 활성해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북성극장이 동아극장과는 <세라자드>, <리오콘쵸스>, <침략전선>, <비밀대전쟁>, <용장 로모로>, <국제첩보국 1급 비밀>, <단디소령>, <알바레스케리>, 문화극장과는 <롱쉽>, <산채로 먹어라>, <서부개척사>, <라스페기>, 현대극장과는 <대추적>, <크로스보대작전>, <백주의 무법자>, <전쟁과 평화> 등 주로 화제의 외국 영화를 상영하면서 서면 극장가의 개척주자로 자리잡아 갔다.북성극장의 뒤를 이어 동보극장, 태화극장, 대한극장도 이에 가세하여 남포동의 부산극장, 대영극장, 동명극장, 부영극장, 국도극장과 연대 동시에 신작 영화가 상영되었다.

동시개봉으로 인해 웃지 못할 추억은 필름영사가 사라져버린 오늘로서는 만감이 교차되는 이야깃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필름이 한 벌 뿐이던 때 연속상영을 위해서는 상영필름이 종료되면 교차 상영할 극장을 향해 전차나 버스, 오토바이 등의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필름을 들고 바쁘게 움직이던 극장 직원의 모습을 쉽게 목격했었다. 북성극장에서는 동아극장으로, 동아극장에서는 북성극장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어야만 했다. 필름이 미처 도착하지 못해 상영중인 필름과 연결이 되지 못한 나머지 중단되면 사실대로 밝힐 수 없었던 극장 측은 필름이 끊어졌다는 식으로 거짓말하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어 대며 소란을 피웠으나 필름이
돌아가면 그것으로 소동은 가라앉았다. 이처럼 필름 수송 사고가 잦아지자 문제 해결을 위해 택시까지 동원됐으며 필름 사고의 화풀이는 영사 기사가 필름을 들고 온 직원에게 분풀이 하기가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