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부산지역 극장사 연구에서 관심사가 되고 있는 부분은 극장취체규칙 시행이 발효된 1895년부터 우선되어야 하지만 검증 미확인으로 인하여 1903년 12월 발행된 ‘부산항 시가 및 부근지도’에 나타나는 극장 행좌와 송정좌가 상존(尙存)하고 있는 시기를 시작으로 활동사진(영화) 상설관 개막 이전 시기인 1913년까지 기간에 세워진 총 8개 극장을 소개한다.

8개 극장은 오늘의 중구 남포동인 남빈정에 위치했던 행좌(1903년?~1915년)를 시작으로 행정(광복동)의 송정좌(1903년?~1911년?), 부평정(부평동)의 부귀좌(1905년?~1907년)와 부산좌(1907년~1923년), 본정(동광동)의 변천좌(1912년?~1916년), 부평정의 동양좌(1912년?~1918년?), 목도(영도)의 질자좌(1912년?~1918년?), 행정(창선동)의 욱관(1912년~1916년?)이다.

이들 극장은 일본 거류지 내에 거주하고 있는 거류민들의 생활 주거지와 경제활동의 중심지에 위치했던 오늘의 중구 지역에 총7개 극장이 밀집되어 있었다. 그것은 부산 구조계조약에 의거 전관 거류지역 범위 내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 때문이었으며 유일하게 질자좌가 영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8개 극장은 모두 무대공연을 목적으로 건축된 연극 전용 극장이었으며 활동사진상설관은 욱관이 상설관으로 구조를 변경, 1914년 활동사진을 상시 운영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사진 상영관 시대가 열렸다.

부산에 극장들이 하나 둘 생겨나던 시기 당시 조선의 중심지였던 경성(서울)에서는 1902년 12월 2일 현대식 상설극장인 협률사가 처음 개관된 이후 1907년 들어 4개의 극장이 선을 보였다. 4월 프랑스사람 마전(馬田)이 서소문 밖 새다리 동편 벽돌집에 활동사진소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5월 28일 광무대가 동대문 전기 회사에 부속된 활동사진소 내에 연극장을 신설하고 활동사진을 상영하였다. 이어서 6월 4일 준공을 본 단성사는 7월 17일 개관되었으며 7월 26일에는 원각사가 협률사를 이어 받아 새롭게 개관되
었다.

1903년부터 1913년까지 부산지역 극장 무대 위에 올려진 공연물들은 대다수가 일본의 공연단들이 건너와 흥행을 주도한 나머지 일본 대중문화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1904년 한 해 동안 극장 행좌와 송정좌의 무대에 올려진 공연물은 12종의 다양한 레퍼토리가 소개됐다. 최고의 인기몰이를 하였던 연극장사에서부터 연극부연절, 죠루리 제문, 즉흥민요, 연극옛날배우, 줄타기 등 곡예흥행, 흥행씨름, 활동사진 및 막간희극, 환등과 죠루리, 마술, 손춤, 연극겐지부시, 비파흥행이 공연되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흥행물 12종 중 10종은 일본인들의 전통에 젖어있던 대중 공연물들로 왜색문화 일색이었다.

이같이 부산은 일본인 전관 거류지를 중심으로 외형적으로는 일본건축물들이, 내적으로는 그들의 정신과도 같은 대중공연문화가 자리 잡혀가고 있었다. 그중 2종은 1895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일반에 상영된 후 전 세계에 보급되어간 활동사진과 환등상영으로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여 서구의 신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들 공연물은 2개의 극장 외에도 수요의 필요성에 따라서는 임시 가설극장이 허가되어 운영되었다. 당시 부산의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한 사유는 1902년 7월 부산매축 주식회사 부산지점이 시작한 항만 매립 공사였다. 공사에 몰려든 근로자가 가장 많았을 때는 1일 한국인 약 900명, 일본인이 약 2,000명이 동원되어 거류지 중심의 주변부에 몰려든 유동인구의 증가세는 이들 극장흥행의 활성화에 한 몫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극장에서의 공연물들은 하층민 사회의 오락물로서, 일반시민들이 관람하기에는 미흡했다고 지적될 만큼 상류층이나 지식층 사회에서는 극장 문화를 폄하평가했었던 시기였음을 엿보게 한다. 활동사진과 환등상영은 활동사진 상설관시대가 아니어서 상영 때마다 막간 희극(니와카)이나 죠루리같은 공연물과 동시에 상연되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영화 상영형식과는 달라서였기 때문으로 1~2분짜리 짧은 실사(다큐멘터리) 영화가 대부분이어서 관객의 흥미와 만족감에 미치지 못함으로 다른 장르물과 함께 공연되었다. 영화상영의 빈도수가 적었던 이유도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제작된 작품이 많지 않았으며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때여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