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에 건축된 극장은 일본 거류지 내의 상권과 주거 중심지역에 가장 먼저 세워졌다. 오늘의 남포동인 남빈정에 행좌를 시작으로 행정에는 송정좌가 가장 먼저 자리했었다. 그 후 세워진 부귀좌와 부산좌, 변천좌, 동양좌, 욱관, 보래관, 행관, 상생관, 국제관, 태평관, 소화관, 부산극장 등 총 14개의 극장이 분포하면서 부산의 극장가하면 오늘의 중구지역으로 인식돼온 것은 조계지를 중심으로 세워진 극장들이 광복 후 보래관은 문화극장, 상생관은 시민관, 소화관은 동아극장, 부산영화극장은 부산극장으로 극장명이 바뀌면서 남포동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극장가를 형성해온 데서 그 유래가 되었다. 그러나 1993년 부산극장이 복합영화관 시대를 주도해나가면서 100여 년 가까운 기간을 누려온 특수는 도시광역화와 함께 그 유명세는 평준화되어갔다. 지역으로 구분하면 행정에는 송정좌와 욱관, 보래관, 태평관 4개 극장으로 가장 많았으며 남빈정은 행좌와 행관, 소화관, 부평정은 부귀좌와 부산좌, 동양좌, 본정은 변천좌와 상생관, 안본정은 국제관, 서정에는 부산극장이 각각 자리했다. 이 지역은 1910~1920년대 부산을 대표하던 3대 영화관인 보래관과 행관, 상생관 체제가 유지되어 오다 행관이 화재로 소실되자 1930년대는 보래관, 상생관, 소화관 시대로 이어졌다. 그 후 1934년 부산극장이 개관되면서 마주하고 있던 소화관과의 공간일대는 후일 BIFF광장의 모태가 되는 단초가 돼주었다. 1925년에는 경남 도청이 진주에서 이전되면서 부산은 인구증가와 교통 흐름의 변화로 인해 1936년, 1942년 두 차례에 걸쳐 시구역이 확장되고 극장가 또한 조계지를 중심으로 한 오늘의 중구 밀집지역에서 서서히 이동되기 시작했다. 이웃 동구지역에는 초량정에 초량좌와 중앙극장, 좌천정에는 유락관, 수정정에는 대화관, 범일정에는 삼일극장이 순차적으로 생겨났으며 이 지역에는 조선인이 많이 거주했던 관계로 극장들은 조선인의 출입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기 위해 조선연극이나 조선영화를 수시로 상연하였다. 영도구는 질자좌(영선정)와 수좌(영선정) 2개 극장, 북구는 구포극장, 부산 토박이가 살고 있던 동래구에는 광복 직전에야 수안정에 동래극장이유일하게 세워졌다. 총 23개 극장 이외에도 중구 대창정에 소재했던 시민의 문화전당 역할을 해 오던 부산공회당을 비롯하여 철도구락부, 동래구락부 등에서도 상설영화관은 아니었으나 부분적으로 영화가 상영되었다. 특히 수요 급증으로 인해 임시허가를 받은 장소에서 영화연극을 상연하는 가설극장이 상시 운영되었다. 당시 영화상영은 상설 및 가설극장 운영 외에도 일제가 그들의 정책이나 시책을 주입시키기 위해 시민과 학생들을 강제동원하여 수시로 계몽, 선전성이 짙은 영화들을 각 지역의 국민(초등)학교 등지에서 상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