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역 앞에 자리했던 대화관 (1942년-1976년)
부산진역 앞에 자리했던 대화관 (1942년-1976년)
✽ 극 장 명 : 대화관(大和館: 야마도간)
✽ 개명극장명 : 대화극장 → 부산진극장 → 은영극장 → 동양극장 → 미성극장 → 동서
극장
✽ 주 소 지 : 부산부 수정정 1
✽ 현 주 소 지 : 동구 수정동 1가 1번지
✽ 개 관 일 자 : 1942년
✽ 폐 관 일 자 : 1976년 6월 11일
✽ 관 주 : 사이조 사다도시(西條貞利)
부산진역 근거리에 자리했던 극장 대화관은 초량좌(1914년?~1917년?), 유락관(1921년~1932년), 중앙극장(1930년~1980년)에 이어 동구 지역에 네 번째 세워진 연극·영화 상영극장이다. 대화관이 개관되던 해 부산지역 극장은 이웃하고 있던 중앙극장이 대생좌로 개명, 경영되고 있었으며 중구에는 전통을 자랑해오던 보래관과 상생관, 소화관, 부산극장, 태평관이 그외 영도의 수좌와 구포극장 등 8개 극장이 상존해 있었다. 대화관의 설립은 1941년 11월 11일 경상남도 당국으로부터 신축허가를 받은 사이조 관주가 1942년 완공 개관되었다.
대화관의 개관 시기에 대해 박노홍은 「한국극장사」(1979)에서 1928년, 부산극장협회의 극장 실태 조사표는 1935년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으나 검증 결과 오류로 확인됐다. 광복기까지 4년 남짓 경영되어 온 대화관에서의 영화 상영 기록은 1942년 5월 1일자 부산일보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5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간 (사)조선영화배급사 제공의 일본 도호(東寶)시대극 <애찌고 지시 마쭈리>와 <결혼의 생태> 2편, <문화영화> 1편, <뉴스96호> 1편이 상영됐다.대화관의 영화공급은 소화관의 배급업체인 사쿠라바상사(주)에 의해 도호영화가 주로 상영됐다. 도호 작품은 <88년째의 태양>, <첫 웃음 구니사다주우지>, <롯파의 신혼여행>, <에노깽의 구라마덴구>, <사나이의 꽃길>, <머나먼 동생>, <싸우는 사나이>, <님을 부르는 노래>, <봄은 어디에>, <롯파 노래의 수도에 가다>, <딸 이야기>, <은방울의 처>, <무시보 뱅깨이>, <빛과 그림자 대회> 등이 상영됐으며 조선영화는 1944년 <어화>(1939, 안철영), <조선해협>(1943, 박기채) 2편이 상영됐을 뿐 소화관, 수좌, 대생좌처럼 자주 상영되지는 않았다.
광복을 맞은 대화관은 1946년 대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새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폐관 때까지는 경영 부침이 심한 나머지 인수자마다 새로운 다짐을 기약하면서 개명한 나머지 부산진극장, 은영극장, 동양극장, 미성극장, 동서극장 순으로 여섯 차례나 바뀌는 악순환이 지속됐다. 적산극장으로 관리되어 온 대화관 역시 타극장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종업원들은 일인 경영주가 남기고 간 대화관을 지키기 위해 이능문(李能文), 임지영(林芝英)이 종업원을 대표하여 극장 관리권 독점에 맞선 성명을 발표하는 등 극장사수에 전력을 다하지만 미군정청에 의해 교육영화연극 연구가인 장인달과 연예인 이능문이 관리인으로 임명되지만 곧 백지화되고 만다.
같은 해 극장명은 부산진극장으로 바뀌고 새 관리인에는 조영(朝映)에서 추천된 윤병호 경상남도 농림국장의 동서였던 양정식(梁正植)이 지배인을 맡으면서 그는 종업원들과 함께 시민에게 알림의 글을 올려 극장 활성화를 위해 노력을 다했다.
일제 재임시 그들의 예술정책에 참을 수 없는 격분을 느껴온 한 관심자로서 해방의 덕택이랄까 이번 부산에서 뜻 둔 바 있었다가 20여 년 기도에 종사한 보람이 생색 되었든지 다행히 부산진극장(전 대화관)의 관리를 맡게 된 데 대하여는 극영화 예술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스스로 책임의 가중됨을 절감하는 동시에 50만 부민제씨에 대한 그 기대에 과히 어그러지지 않을 만한 노력을 이에 맹세하고자 하나이다. 무릇 극장이 가진 사명이란 대중의 건전한 정서도치와 동시에 일반문화 향상의 입지에서 볼 땐 계몽적 임무 또한 크다 아니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외다. 이것은 미국이 그 역사가 장구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과 같이 기계 최고의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영도해 나가고 있는 실정을 볼 때는 그 이면에 있어서 록펠러 같은 거대한 재벌이 이 방면에 양심적이며 희생적인 노력을 제공했음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그러기에 일제의 문화정책의 앞잡이 노릇을 한 극영화관이 내일의 운영방침이 그러했고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건설에 이바지할 견실한 민족문화의 수립과정에 있어서의 우리의 책무 또한 작지 않다고 믿습니다. 일제의 잔재소탕이 그러하고 봉건유풍의 배격랑풍을 훼손하는 저급한 오락물의 숙청 또한 그러하며 일보 나아가서는 건전한 우리 문화의 적극적 선양과 향상에 이바지함이 그러리라고 봅니다. 부디 이 의도를 사주셔서 경마에 매질하여 소기의 목적 달성에 성원해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1947년 1월 1일 민주중보)
이상의 성명과 같이 부산진극장 종업원 일동은 차후 불하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악전고투를 견뎌내어야만 했었다. 해방공간의 대화극장에서는 악극단 공연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한국영화는 창고에 쌓여 있던 무성영화 <아리랑>(1926, 나운규)을 비롯해 <금붕어>(1927, 나운규), <사나이>(1928, 홍개명), <숙영낭자전>(1928, 이경손), <승방비곡>(1930, 이구영), <무지개>(1936, 이규환), <애련송>(1939, 김유영) 등이 재상영됐다.
이들 영화가 상영되면서 왕년의 명해설가(변사)였던 이상호(李相浩), 홍순중(洪淳中), 조월해(趙月海)등이 1946년 대화극장 무대 위에 다시 서는 진풍경이 한동안 이어졌다.
1946년 11월 개명되는 부산진(釜山鎭)극장은 1949년 6월 은영(銀映)극장(대표: 최성안 崔聖安)으로 바뀌고 1954년 9월에는 동양(東洋)극장(대표: 이명조 李命祚)으로 다시 개명되었다. 1958년에는 301평 7합 대지 위에 개관 당시의 1층 건물을 2층 철근 콘크리트로 개축하여 6월 9일 재개관되었다. 극장 무대는 28평, 좌석 수는 1층 353석, 2층 56석, 허가정원은 총 546석, 화장실은 1층에 대 7개, 소 10개, 비상구가 1층 6개, 2층 1개의 구조를 갖춘 중형극장으로 변모했다.
동양극장은 1959년 4월 6일 김상규(金相珪)가 인수하면서 미성(美星)극장으로 다시 바뀌었다. 1974년 마지막으로 개명되는 동서(東西)극장은 2편 동시상영의 3번관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76년 이웃하고 있던 수정극장과 시민관(옛 상생관), 국제극장 등과 함께 폐관됐다. 동구 지역민들의 대중문화 공간으로 34년간을 버텨왔던 대화관이 폐관된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는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