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극장 시대(1959년~1973년)
광복과 함께 징발된 문화극장(文化劇場)은 14년간에 걸쳐 미군 전용극장, 임시 수도 국회의사당, 미군 전용 위안극장, 부산우체국 국제우편과 등으로 사용되어 오다 의용촌에 운영권이 넘어가는 등 결코 적지않은 세월을 낭비해오다 내부시설 공사를 마친 박용실 대표가 1959년 4월 16일 당국으로 부터 극장설치허가를 득한 사흘 후인 4월 18일 이규환 감독의 <애련의 꽃송이> 상영을 시작으로 새롭게 재개관되었다.
무대 23.39평, 1층 514석, 2층 358석, 총 872석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개봉관으로 출범한 문화극장은 기존의 부산극장, 동아극장, 시민관을 비롯해서 1955년~1956년부터 개관되는 현대극장, 국제극장, 제일극장, 대영극장 등과 함께 새로운 경쟁시대를 맞으며 외화 전문관으로 출범했다. 한국영화 상영의 비중이 낮았던 문화극장은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공처가>(김수용), <인생대학 1년생>(윤봉춘), <3인의 신부>(김수용), <자식복돈복>(윤대룡), <백사부인>(심우섭), <어머니>(정일택), <백의 천사와 꼽추>(강태웅) 등이 상영되었다. 외국영화는 많은 화제작들이 상영됐다. 쥴스닷신의 <공포의 거리>, <벤갈연대>, <흑취>, <불꽃은 바다에 지다>, <트로이의 헬렌>, <검은 눈동자>, <풍운의 젠다성>, <형제는 용감하였다>, <카라마조브의 형제>, <대해적 헤라크레스>, <보봐리 부인>, <용감한 사나이>, <역전>, <밷시드>, <모감보>, <백작부인과 해적>, <몬테크리스트 백작> 그 외에도 서울의 대형 영화관인 대한극장에서 상영된 70미리 흥행작들이 모두 이곳 문화극장에서 상영되었다. <남태평양>을 시작으로 <벤허>, <바라바>, <북경의55일>, <롱쉽>, <로마의 제국의 멸망>, <캉캉>,<서부개척사>,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것이 씨네라마다>, <오크라호마>, <콰이강의 다리>
<막켄나의 황금>, <안네의 일기>, <세브리느>, <화니걸>, <왕과 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왕중왕>, <쿼봐디스>, <사상 최대의 작전> 등을 보기 위한 관객들은 언제나 긴 꼬리를 문 행렬이 이어져 인근 동아극장과는 경쟁적인 쌍벽관계를 이루었다.
<벤허>(1959)는 대한극장이 장장 8개월을 독점 상영한 후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1962년 10월 27일 문화극장이 단독으로 상영하면서 경남지역 관객들까지 영화를 보러왔다. 4시간 상영의 이 영화는 아침 10시 30분, 낮 2시 40분, 밤 7시 20분, 1일 3회 상영되었다. 요금도 A석 150원, B석 1회한 95원, 대학생 70원, 초중고생 50원으로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의 비싼 금액이었다. 히치콕의 <사이코>나 존 포드의 <역마차> 등 보통 영화 입장료가 55원 이었으니 3편을 볼 수 있는 금액이었다. 마지막 3회 상영 경우에는 종료 후 통행금지로 인해 귀가 시간이 부족했던 관객은 여관 신세를 져야만 하는 불편을 감수하기까지 했다. 1960년대 들면서 문화극장의 환경은 주변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1961년 동명극장, 1969년 부영극장과 국도극장, 1970년 서면 대한극장 등 대형 매머드 극장이 들어서면서 노후된 문화극장은 <벤허>를 고별작으로 1973년 8월 27일 59년 만에 폐관된 후 극장은 헐리고 지금은 국민은행 광복동 지점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