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 욱관 (1912년~1916년?)
✽ 극 장 명 : 욱관(旭館: 아사히간)
✽ 주 소 지 : 행정 1정목 / 중구 창선동
✽ 개관일자 : 1912년 9월 21일
✽ 폐관일자 : 1916년?
✽ 관 주 : 미상

1912년 기석식 연극공연 극장으로 개관했던 욱관은 남빈정의 행좌(1903년?~1915년), 부평정의 부산좌(1907년~1923년), 본정의 변천좌(1912년?~1916년), 부평정의 동양좌(1912년?~1918년?), 목도의 질자좌(1912년?~1918년?)와 함께 경영되어 오다 부산에서는 가장 먼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시설을 갖추고, 1914년 3월 12일부터 연중무휴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본격적인 활동사진 상영관 시대를 열어 나간 곳이다. 일본 활동 사진 주식회사와 천연색활동사진주식회사의 영화를 공급받았던 욱관에서는 대부분 양화(洋畵: 외국영화)와 일본영화가 상영되었다. 1915년 4월 27일부터 5월 3일까지 1주간 상영된 프로그램은 매우 다양했다. 태서소년극 <양몰이소년>, 최장척 신파비극 <의외의 초록>, 전 4권짜리 구극 <우스다 하야도정 일대기>, 최장척 태서대활극 <모타보트>, 그 외 제명 미상의 실사(기록영화) 1편과 골계(희극) 1편으로 총 6편이 매일 두 차례 상영되었다.

욱관 경영은 영화를 설명하는 작품 해설자인 일본인 변사를 주임변사, 보조변사, 여변사 여섯 명을 상주시키면서 작품 상영이 끝나면 다음 상영작을 준비하는 10분간의 휴식시간에 전속 음악사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등 관객을 위해 서비스에 정성을 다했다. 욱관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경영을 개시한 지 1년 후인 1915년 3월 9일 욱관과 이웃하고 있던 보래관이, 같은 해 12월 19일에는 신축 개관되는 남빈정의 행관이, 1916년 1월부터는 동양좌가 대흑좌로 이름을 바꾼 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가세하면서 부산은 총 4개의 상설관이 경쟁경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상설관 1호인 욱관은 1916년 1월 11일 이후부터 경영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폐관된 것으로 유추될 뿐 폐관 사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영화상설관으로서는 2년 남짓 경영된 욱관에 관련하여, 박원표07는 “…은 불탄 욱관 자리에 목조의 보래관을 세워 영화상설관으로 개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오류로 확인되었을 뿐 폐관 사유가 화재였는지는 규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박원표가 주장한 욱관 자리에 보래관이 건축된 사유에 대해서는 두 극장이 동일지역 내 가깝게 각각 상존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를 규명해준 자료는 1914년 경상남도청 편찬 조선시보사가 발행한 「경상남도안내」다. 같은 해 부산에 소재하고 있던 극장 행좌(남빈정)부터 부평정의 부산좌와 동양좌, 초량동의 초량좌, 영도의 질자좌 5개 극장과 기석식 공연장인 행정의 욱관과 보래관, 본정의 변천좌 3개 극장 포함, 총 8개의 극장현황이 제시되고 있어 욱관과 보래관은 각각 독립된 극장이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1918년 3월 10일 박문당이 발행한 ‘부산시가전도’ 역시 행좌, 부산좌, 동양좌, 보래관과 함께 욱관이 각각 상존하고 있어 이를 재입증시켜 주었다. 「경상남도 안내」는 욱관과 보래관의 극장 전경이 수록되어 귀중한 사진자료가 발굴되는 성과까지 올렸다. 특히 보래관의 모습은 「신부산대관」(1934)에 소개된 전경사진이 관례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1916년 1월 29일자 부산일보에 보도된 보래관 전경과는 그 외관이 다른 의문점을 두고 지속적으로 자료추적 중 「경상남도 안내」에 수록된 전경과 일치하면서, 보래관은 1938년 재건축된 모습과 함께 세 차례나 그 얼굴이 바뀌는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규명했다.

욱관, 보래관 두 영화관의 실체는 앞의 자료 외에도 1915년부터 부산일보와 조선시보에 영화광고가 동시에 게재되고 있어 이를 재확인해 주었다. 욱관 자리에는 1986년 소극장 시네마극장이 개관되어 경영되어오다 1996년 폐관되었다.


07 부산의 흥행가 「향토부산」, 태화출판사, 1967년, 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