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영화 기록 발굴은 지난스런 작업이었다”
극장취체규칙 시행으로부터 120년을 맞는 부산지역 극장사

트로이를 발굴한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은 일곱 살 때 아버지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그림세계사」에서 불타는 트로이성 삽화를 보고 언젠가 그것을 찾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성장했다.

1870년 시작된 트로이 발굴은 늪지대의 모기 때문에 말라리아가 창궐했고 인부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며, 행정기관의 업무처리는 굼뜨기만 했다. 한편, 그를 의심한 학자들은 그를 바보취급까지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열정을 막지 못했고 마침내 실재했었던 성(城), 트로이와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임을 밝혀냈다.

슐리만을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은 영화도시 부산의 오늘이 있기 오래전인 1967년 박원표가 저술한「향토부산」의 「부산의 흥행가」를 접하면서였다. 「부산의 흥행가」는 해방 전에 보래관(후일 문화극장), 상생관(부민관→시민관), 소화관(동아극장), 부산극장, 수좌(항구극장), 대생좌(중앙극장), ㄷ화관, 삼일극장, 행좌, 행관, 부산좌, 초량좌, 욱관, 태평관, 국제관, 유락관 등 총 16개의 극장이 있었음을 기록하므로 일제강점기에 이렇게 많은 영화관이 부산에 상존하며 극장(영화)문화가 꽃피워진 것은 놀라운 일이었으나 이에 관한 자료 부재와 더불어 검증조차 요원하여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채 허송세월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우리 영화사에서 조차 「한국영화전사」(1969, 이영일), 「한국영화총서」(1972, 전범성)는 동일하게 1925년 기준으로 상생관, 행관, 국제관 3개 극장만을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지역문화 연구에서 이와 같이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 그들 문화에 대한 배타적 자세와 더불어 이후 벌어진 한국전쟁과 잦은 화재사고 등으로 자료의 파괴와 망실로 인하여 흩어진 자료들을 퍼즐게임 하듯 연계하여도 일치되는 사안보다는 서로 다른 내용으로 인해 오히려 미궁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아지면서 혼돈속의 미로에 갇힌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활력소가 모색된 것은 과거 사료도 중요하지만 현재와 미래를 위해 새로이 시작한다는 자세로 1978년부터 부산지역 개봉영화관의 간판미술기록촬영 작업에 들어가면서 간판이 사라진 2002년까지 매주마다 교체되는 작품을 빠짐없이 카메라에 수록하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그런 과정에서 과거 부산극장 미술부에 근무했던 김건일로부터 한 장의 귀한 사진(본문214쪽)을 받으면서 부산영화연구는 새롭게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진을 본 부산 극장계의 원로인사들은 휴전 직후의 부산극장 모습을 아무도 규명해주지 못하였으나, 부산일보 광고 자료를 확인 끝에 1954년8월4일 악극단 호화선이 공연한 <그대이름은>을 촬영한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한 장의 사진을 구해내는 것도 문제였지만 사진에 얽힌 사연을 밝혀내는 것도 적지 않은 시간과 탐구가 뒤따르면서 잠자고 있던 박원표의 해방 전 부산극장사 연구에 날개를 달게 된 것은 1997년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발행된 일본어 일간 신문인 부산일보와 조선시보가 마이크로필름화되어 열람이 가능해지면서였다. 1914년 11월부터 1944년 3월까지의 자료에서는 그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상당한 양의 극장개관 관련 기록은 물론 화재사고, 통계기록 등의 모두 여기에서 출토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부산의 흥행가」에서 드러낸 상이점과 의혹들이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부산의 흥행가」에서 밝힌 극장 외에도 송정좌, 변천좌, 동양좌, 질자좌 4개소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특히 극장 욱관, 보래관이 동일 장소에서 극장명이 바뀌어 경영된 극장이 아닌 이웃에 나란히 위치해 동시대에 경영된 사실도 밝혀냈다. 그러나 극장사 연구에서 가장 뒷받침 되어야 하는 자료로는 극장 전경사진을 입수하는 것이 중요한 성과라 판단하여 1926년 발행된 「부산대관」에서 행관을, 1934년「신부산대관」에서는 보래관, 상생관, 소화관, 태평관, 부산극장, 부산공회당의 사진을 채록하게 되었다. 이들 극장 사진 사료는 이미 잘 알려진 부분이었으나 1904년 처음으로 활동사진이 상영됐던 부산 최초이 극장 행좌와 1914년 활동사진 상설관 시대를 연 욱관의 발굴은 최고 난제였고 묘책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산도시를 연구해오던 일본인 친구 이시바시가 행좌 사진을 보았다는 뉴스를 전했다. 그가 본 책은 표지가 떨어져나간 출처 불명의 도서로 첫 날은 도서조차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가 두번째 방문에서는 책은 열람하였으나 행좌 사진을 확인 못하고 귀가했다. 오기가 발동한 필자는 책장을 꼼꼼히 넘기던 중 뜻밖의 발견을 했다. 행좌 사진은 수곡여관을 소개하는데 포함되어 있어 보통의 시각으로는 찾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 나타난 총 3장의 사진 가운데 극장 행좌는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확인해 낼 수 없는 사진이었다.

산삼을 캐다보면 인근에서 다시 캘 수 있을 확률이 높은 것과 같이 도서명으로 보아서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1924년 경상남도에서 편찬한 ‘경상남도안내’를 보았다. 목차는 극장과 영화 관련 항목이 없어 접으려다 뒤적이던 중 제11장 내지인 주요 집단지의 극장소개와 함께 마지막장에 보래관과 변천좌, 욱관 광고가 게재되어 있었다. 욱관을 소개하는 광고 속에는 다행스럽게 전경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렇게 해서 광복 전 23개 극장 중 발굴된 자료사진은 총 15개 극장. 그러나 아직도 송정좌, 부귀좌, 변천좌, 동양좌, 질자좌, 초량좌, 유락관, 구포극장 8개소가 오리무중으로 본 부산극장사에서는 지도자료와 신문광고를 제시해 주었다. 1903년 지도상에 나타나는 행좌, 송정좌로부터 2014년 12월 1일 현재까지 부산지역에 세워진 극장은 총 176개소. 원고가 마감된 이후 기장군 동부산관광단지 내 롯데몰 동부산점에 또 하나의 극장이 세워진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부산지역 극장사 연구에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이슈는 1895년 8월 1일 부산 이사청이 제정 시행에 들어간 <극장 및 흥행 취체규칙>은 1895년에 극장이 상존했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극장 행좌가 그 실체적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3년 부산항 시가 및 부근 지도가 처음으로 「해은일록」(海隱日錄)「일선통교사」(日鮮通交史)「상경일기」(上京日記)「동래감리서일록」(東萊監理署日錄) 등 기타 많은 당시의 문헌에서는 해당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향후 1895년을 실증적으로 검증할 사료 발굴이 있기까지 유보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끝으로, 「부산극장사」가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조의덕 국도극장부사장, 신용학 부산극장협회전무,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을 비롯하여 유효종 영상문화산업과장, 김유진 영상산업담당, 오석근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강성호 사무처장, 권소현, 그리고 편집, 출간에 애써주신 <도서출판 부산포> 김한근 대표와 직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4년 12월 26일
홍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