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립 부산극장 시대는 광복을 맞은 부산영화극장이 미군정기를 거쳐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적산극장이란 딱지를 뗀 후 주식회사 부산극장 시대의 탄생과 함께 정착되기 이전까지 약 6년 동안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의 기간이다. 짧은 기간에 극장명과 행정구역은 수 차례 바뀌고 임시수도의 국회의사당 사용과 관리자의 변동 등 많은 난관을 겪어온 격동의 시기였다.

1949년 9월 9일자 민주중보 1면 하단은 도립 부산극장 종업원 일동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하여 당시 도립부산극장의 현실적인 상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어 소개한다.

단기 4280년(1947년) 5월 27일 부산극장이 도립으로서 탄생한 이래 관계당국과 강호제현의 절대 하신 성원과 협조로써 항도 50만 시민의 문화전당으로 비약적 발전을 보게됨을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오등(吾等)은 기○관계당국과 제현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고 극장사명과 민족문화예술 앙양에 일심합력 하여 묵묵히 상부명령 지시대로 실천해 나오던 중 8월 30일부 시내 각 신문지상에 보도된 바와 같이 지도당국의 방침에 의하여 금번 본 극장을 10월 15일부로 그 운영일체를 문화인에게 환원한다는 사실은 ○인이 이미 주지하는 바입니다.

유이(玆以) 오등 종업원 일동은 새로운 단계에 대처코저 도립이 ○혹은 일반인 이 경영하던 간에 자기 직무만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맹세하여 ○압으로 중대한 관심으로써 관리인 결정에 주목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과거에 있어 사회적 제약과 부득이한 난관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닌 약간의 운영상 적자를 보았으나 그 후 오등 종업원 일동은 새로운 각오로서 분투노력한 결과 드디어 적자는 흑자로서 현저한 기여를 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벌써 추계의 연예시기를 맞이하여 가일층 그 사명 완수에만 유감업기를 기코져 일동단결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리인 선정에 결정권을 가지신 관계당국과 강호 제현에 앙청하건대 이상의 본 극장 자체의 실정을 널리 참작하시와 양심적인 문화인! 극장을 오등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인사를 십분 고려하시와 선정하여 주심을 앙망하며 해방 후 문화란 성스러운 간판 아래 이면엔 사리사욕을 꿈꾸는 악질분자 혹은 배후에 권력과 금권을 도구로 문화란 의식조차 모르는 분자들이 오직 관리권 획득에만 급급하여 날뛰는 실례에 비추어 관계당국 및 일반의 현찰(賢察)을 빌며 공정한 후원을 바랍니다. 끝으로 항도 50만 시민의 사회교당인 동시에 위안 전당인 본 극장을 사랑하고 성원해 주신 각층 각계의 제현과 제단체에게 심기 사의를 표하오며 오등 일동은 정의는 반듯이 승리할 것을 최후까지 믿고 본 극장 본래의 사명완수에 굳은 ○○을 함과 아울러 자이 명하는 바입니다.

부산영화극장은 광복을 맞으면서 1946년 1월 1일부터 새 시대에 걸맞는 새 이름 항도(港都)극장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1947년 들면서 개관 당시 극장명인 부산극장으로 환원되어 사용돼오다 같은 해 5월 16일 경남도 극장 관리 위원회는 극장명을 다시 도립(道立) 부산극장으로 사용을 결정14함으로 이름이 자주 바뀌는 혼선이 있었으나, 1949년부터는 본래의 부산극장으로 복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은 부산부 서대신정 1정목 62번지15로 변경되고 경영은 김재동(金在東) 대표가 운영해오다 1946년 미 군정청에 의해 작가 김정한과 연출가 이재봉이 임명 관리16되지만 이틀 후 경남도청 장관인 칠레스트 대령의 성명에 의해 구 종업원의 관리체제로 유지되어 오다가 도립 부산극장이 되면서는 작곡가 금수현(金守賢)이 극장장을 맡아 관리돼왔다.

극장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월 4일부터 6월 11일까지 임시수도 부산의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어 오던 중 같은 해 7월 3일 김월용(金月龍), 박봉갑(朴鳳甲), 오석조(吳碩祚), 신덕수(申德守), 김억조(金億兆), 김활경(金活更), 이상필(李相弼) 7명이 공동명의로 불하17를 받아 (주)부산극장을 설립함으로 적산시대 청산과 함께 도립 부산극장 시대는 완전 막을 내렸다. 당시 부산극장의 영업경영은 영화상영보다는 공연물이 뚜렷한 강세를 보였다. 한국영화 제작이 열악했던 나머지 광복 이후 생겨난 각종 연극 및 공연단체들의 공연물들이 봇물처럼 범람했던 시기였다. 악극단 빅토리를 시작으로 KC 악극단, 조선 악극단, 김인수 창극단, 국보악단, 동양 악극회, 백란 악극단, 태평양 가극단, 해동 악극단, 백민 악극단, 빅터 가극단, 제일 악극단, 서울 악극단, 백조 가극단, 악극단 백만불, 동방 악극단, 약초 가극단, 현대 가극단, 나나 악극단, 반도 가극단, 악극단 새별, 무궁화 악극단, 악극단 해연, 아리아 가극단, 신세계 악극단, 신천지 악극단, 악극단 화랑, 극단 창조극장, 문화극장, 낙랑극회, 시민극장, 극단 호화선, 극단 예술, 전진극장, 극예술협회, 극단 독립극장, 극단 보랑, 극단 연극호, 극단 대중극회, 극단 신청년, 극단 춘추극회, 국극사, 극단 황금좌, 극단 평화극장, 여성국극협회 등이 발표한 공연물이 연간 50편 이상 부산극장의 무대에 올려졌다. 이상의 통계는 당시 부산서 발행된 일간신문 민주중보, 부산일보, 국제신문 자료를 검증한 결과 1947년 48편, 1948년 57편, 1949년 79편, 1950년 68편으로 비공식 집계(신문자료 결본으로 인함)된 것이다.

영화상영은 한국영화의 경우 이규환의 <민족의 새벽>(47), <집 없는 천사>(41, 최인규), <새로운 맹서>(47, 신경균), <패자의 수도>(47, 유장산), <윤봉길 전후편대회>(47, 윤봉춘)가 개봉되었을 뿐 <서윤복 선수>, <제51회 보스톤 국제마라톤대회>, <한국전란 뉴스영화>, <한국전란뉴스 421호>, <세계뉴스 285호>, <세계뉴스: 인천상륙작전>, <최신뉴스>, <대한전란 뉴스>,<최근 전란뉴스>, <전황뉴스>, <특보 서울입성뉴스 424호> 등의 스포츠 및 한국전 기록영화가 공연물과 함께 상영됐다. 외국영화는 데아나 다빈 주연의 <크리스마스의 휴가>, <카사부랑카>, <로미오와 쥬리엣>, <모히캉족의 최후>, <북해의 남아>, <속편 소년의 거리>, <나의 길을 가련다>, <엉터리 죽수소동>, <콜시카의 형제>, 찰스 로톤의 <노틀담의 꼽추>, <브로드웨이>, <의혹의 애정>, <영원의 처녀>, <모험>, <타잔의 황금>, 무성영화 <왕중왕> 등의 미국영화로부터 프랑스영화 <주장(酒場)의 모(母)>, <여자만의 도회>, <육체와 환상>, <불란서좌>, <성중(星中)비행>, <쾌남빼아긴토젠>, <순백한 처녀지>, <무도회의 수첩>, 독일영화 <알프스의 용사>, <어머님의 사랑>, <유랑의 왕자>, <푸른제복>, <사막의 지평선>, <궁전음악회>, <어머님의 눈동자>, 중국영화 <간첩 천일호>, <항일전 8년>, <맹강녀>, <혈누화잔>, 영국영화 <처녀의 애정>, <꽃피는 시절>, <조국을 위하여>, <소로몬 결사대>, 오스트리아영화 <부르그극장>, 러시아 영화 <낙천경> 등이 개봉됐으나 일부 작품은 광복 이전에 이미 공개된 필름이거나 제작된지 오래된 영화가 적지 않았다.

그 외에도 도립 부산극장의 무대에서는 음악회, 연주회, 군악대 연주, 군악과 군연극대회, 신인 가수 선발대회, 마술, 아마추어 권투대회, 고등학교 및 국립 부산대학교 예술제전 발표회, 부산 연예단체 연합대공연, 국경일기념 공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려 시민문화의 광장으로 다채로운 역할을 소화해냈다.


14 1947년 5월 18일 민주중보
15 1945년 12월 25일 민주중보
16 1946년 3월 17일 민주중보
17 1950년 12월 17일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