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학무국 소속으로 관리되어온 도립 부산극장은 그 어려운 때를 지켜냈던 극장 종업원들이 오석조를 대표로 김월용, 박봉갑, 신덕수, 김억조, 김활경, 이상필 공동으로 1950년 12월 13일 제8회 귀속재산 경쟁입찰 신청(불하)에 들어갔다. 정부 사정가격은 4,500만 원이었으나 최종 낙찰금액은 오대표가 제시한 최고 입찰가격인 1억 8,900만 원으로 확정됨으로 극장을 실질적으로 운영해왔던 극장 종업원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낙찰 과정에서는 강력한 경쟁 상대인 대동공업회사 강영규(姜永圭)가 1억 7,000만 원을 신청하여 아슬하게 비켜 갔었다. 그 외 조선제강이 1억 2,500만 원, 마산찬촌이 4,100만 원, 평정양조가 2,200만 원, 동아마계가 1,800만 원으로 입찰에 참여했었다.18 결과적으로는 광복 후 각 극장마다 종업원과의 승계 또는 권리 이전 과정에서 발생했었던 잡음을 볼 때 도립 부산극장의 경우는 해당 극장의 종업원들에게 되돌려준 모범 사례가 되었다. 낙찰이 확정된 부산극장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7월 3일 자본금 300만 원을 불입 후 극장명을 개관 당시의 본명인 부산극장(釜山劇場)으로 개명하여 주식회사 부산극장을 설립함으로, 제1기 체제가 출범됐다. 초대회장에 박봉갑, 사장 김월용, 전무 오석조, 상무 김활경, 감사 신덕수가 임원진으로 선출되어 다가올 한국영화 전용관 시대의 서막을 열어 나갔다. 이 시대를 이끌어 간 부산극장의 대표는 김월용(1951년)을 시작으로 오석조(1954년), 박봉갑(1960년), 김활경(1973년) 순으로 이어지는 4인방이 25년간 경영해 오면서 이웃하고 있던 동아극장, 문화극장, 시민관을 비롯하여 새로이 세워지는 현대극장, 국제극장, 제일극장, 대영극장, 동명극장, 부영극장, 국도극장과의 치열한 흥행 전쟁에서 1959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영화 상영만을 고집하는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주)부산극장의 전성기를 항진해 나갔다.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기초를 다져나간 오석조 대표가 경영하던 시기의 부산극장 소재지는 부산시 충무로 2가 18번지에서 시의 구편제 변경으로 인해 중구 충무동 2가 18번지로 바뀌었다. 극장경영은 1기 박봉갑 회장이 휴전으로 한국전쟁이 종료된 후인 1954년 7월 31일 김월용 회장으로 바뀌면서 사장에 오석조, 부사장 박봉갑, 전무 김활경, 상무 이상필, 감사 신덕수의 제2기 체제가 들어서면서 극장의 외관이 1955년 9월 13일 대규모 증축공사 끝에 현대화된 외관으로 탈바꿈했다.

이 외관은 1982년 재신축공사에 들어가기 위해 철거되기까지 27년간 사용되었으며 개관 때의 극장 구조 및 규모는 기록이 남겨지지 않아 알 수 없으나 1955년도 증축공사는 외관의 변화와 함께 대형 극장으로 구조가 바뀌면서 좌석 수는 1층 907석, 2층 327석, 총 1,279석으로 부산지역 극장중 최고를 자랑하는 곳으로 변모됐다.

대지 325평에 건평은 1, 2층 합계 474평 2.8합의 2층 철근 콘크리트 구조였던 부산극장은 무대가 75평으로 다른 극장에 비해 넓었으며 스크린 사이즈는 가로 11.5m, 세로 5.3m였다. 그러나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1층 뒷부분의 일부 좌석은 좌우에 대형 기둥이 있어 만원일 경우 기둥으로 인해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되어 지적 사항이 되기도 했다.

위생시설은 환기장치가 8개소, 화장실이 1층에 대 13개, 소 10개, 2층에 대 8개, 소 11개 총 42개소였으며 비상구는 1층 7개소, 2층 1개소를 갖추어 단관으로서는 만원일 경우 짧은 시간 내에 관객 전원을 퇴장시킬 수 있는 시설로 보완됐다.

오석조 대표 체제는 1957년 7월 30일 재신임을 받아 부사장 박봉갑, 전무 김활경, 상무 임학규, 감사 신덕수 체제로 경영되어오다 1960년 8월 10일 박봉갑 대표, 회장 오석조, 부사장 신덕수, 전무 김활경, 상임감사 이연식으로 승계되면서 극장은 한국영화 전용상영관으로서의 토대를 완전하게 구축해 나갔다.

적산극장 딱지를 떼고 출범한 (주)부산극장은 1951년 6월 13일 극단 신진의 <전유화> 전 2막과 김말봉 원작 <찔레꽃> 전 3막 5장을 개관 공연작으로 4일간 올렸다. 오후 1시, 4시, 8시 3회 상연에는 후일 한국영화의 중심역할을 하게 되는 중견배우 최남현, 정민, 김신재, 이민자, 유계선, 최승이 등이 무대를 빛냈으며 1951년 말까지 부산극장은 악극단 KAS, 가극단가협 등의 공연물이 총 32회 상연되었을 뿐 영화는 단 1편도 상영되지 못했다.

1952년 들어 부산극장은 외국영화 <애원의 섬>, <야수>, <푸른리봉>, <열차는 달린다> 4편과 공연물 68편이 상연되어 도립부산극장시대의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되어 왔으나 해를 거듭하면서 외화수급이 원활해지자 외화상영 편수가 늘어나면서 동아극장, 부민관과 함께 독점상영 됐으며 한국영화는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수급이 제자리걸음 상태에 머물렀다. 1953년은 외화 <젊은이의 양지>, <북서로 가는길>, <파도>, <광연(狂戀)>, <올프에>, <황금의 관>, <찌프의 네 사람> 7편과 공연물 51편이 상연됐으며 1954년은 외화 <보제스트>, <해양아>, <톰소야의 모험>, <쟝글북>, <쎈세이숀>, <강가딘>, <푸른 지평선>, <열사의 비밀>,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 <유형의 대륙>, <코로라도의 결투>, <도바의 흰절벽>, <파리의 아메리카인> 13편, 공연물 54편으로 외화가 전년도보다 2배 증가세를 보였다. 1955년 외화는 <지상 최대의 쇼>, <은배>, <로마의 휴일>, <스타탄생>, <애니여 총을 잡아라>, <쿼봐디스>, <검객 시라노> 등 18편으로 증가된 반면 수급이 여의치 못했던 한국영화는 <양산도>(김기영) 1편이 상영되었다. 1956년 외화는 전년과 같이 <베라크루즈>, <센>, <정욕의 악마>, <여호>, <애상>, <나이아가라> 등 18편이었으나 한국영화는 신상옥의 <젊은 그들>, 유현목의 <교차로>, 전창근의 <단종애사>, <마의 태자>, 이만흥의 <구원의정화>, <비류>, 안종화의 <사도세자>, 정창화의 <장화홍련전> 등 13편을 상영, 빠른 증가세를 보이면서 부산극장은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성장해가는 신호탄이 돼주었다. 1957년 외화는 <선셋대로>, <악의 결산>, <피터판>, <바람과 함께 지다>, <삼총사>, <전송가> 등 12편으로 줄어든 반면 한국영화는 신상옥의 <무영탑>, 조긍하의 <황진이>, 김기영의 <황혼열차>, 박상천의 <해정> 등 26편으로 늘어나 전년 대비 50%가 증가하면서 외화를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1958년 한국영화는 시네마스코프 제1회작품 <생명>(이강천)과 <곰>(조긍하), <지옥화>(신상옥), <낙화유수>(안현철) 등 37편이 상영된 반면 외화는 <회전목마>, <칼멘죤스>, <요절 하바나 소동> 단 3편이 상영되면서 (주)부산극장은 다음해 1959년부터는 한국영화 만을 전용으로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정착해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972년까지 14년 동안 외국 영화는 단 1편도 상영되지 않았으며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유명세를 날리기 시작했다.


18 1950년 12월 15일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