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부산에 세워진 극장의 외형은 서구형 극장건축양식이 아닌 전통 일본식 극장인 가부끼좌의 형식을 본따 세워져 한일합병 이전부터 일본의 정치, 문화적 색채를 조선에 뿌리내리기 위함이었다. 극장명도 일본식으로 표기되고 있던 좌(座)나, 관(館)으로 불려졌다.
극장(劇場)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초량동에 세워진 중앙극장이 처음이었으며 그 후 부산극장, 삼일극장, 동래극장, 구포극장 등으로 이어졌으며 오늘날에는 시네마, 영화관, 문화관, 프라자, 시네마홀 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변화해오고 있다. 극장명은 동(洞)명과 주요거리명을 사용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행정거리와 이웃했던 남빈정의 행좌와 행관, 변천정 거리에 있었던 본정의 변천좌, 초량정의 초량좌, 구포의 구포극장, 동래의 동래극장 등이다. 부산좌와 부산극장, 부산공회당은 도시명이 붙여진 경우며 1931년 부산에서도 일왕의 연호를 사용한 소화관(昭和館)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욱관, 유락관, 태평관, 수좌는 타지역이나 일본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는 동일한 극장명에 속한다. 초기의 극장운영은 공연물 중심의 연극전용 극장으로 시작됐으나, 활동사진이 등장하면서 활동사진 상설극장과 연극 및 활동사진을 동시에 운영했던 극장 등 3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초기로부터 1913년까지 활동사진 상설관시대 이전에 세워진 대부분의 극장은 일본의 신극, 구극 등이 공연되는 무대 위주의 연극 전용극장이 대부분으로 행좌, 송정좌, 부귀좌, 변천좌, 질자좌, 태평관 등이 모두 여기에 속했다. 활동사진 상설관 시대의 등장과 함께 세워진 보래관, 행관, 상생관, 소화관, 동래극장 등의 극장은 활동사진만을 상설로 상영하였던 극장이다. 반면 연극과 활동사진을 동시에 상연하였던 극장은 가장 많은 12개소나 되었다. 부산좌 및 욱관, 동양좌, 초량좌, 국제관, 유락관, 수좌, 중앙극장, 부산극장, 구포극장, 대화관, 삼일극장 등이다.
극장명이 바뀌는 경우는 극장이 매매되거나 임차되면서 새 극장주가 운영쇄신 등을 명분으로 개명되어 경영됐다.
동양좌는 대흑좌로 개명한 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하여 경영에 들어갔다. 행관과 수좌의 경우는 특별했다. 사꾸라바 후지오가 인수한 후 직영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행관을 제1행관, 수좌를 제2행관으로 개칭 경영했으나 그 후 행관, 수좌로 다시 복원되었다. 중앙극장은 상생관 대표 미쯔오 미네지로오가 인수하면서 대생좌로 개명한 후 상생관과 동시개봉이라는 영업방식을 도입 경영했다. 그러나 대생좌는 대생좌로 광복이 되면서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일부 발표자는 최초 극장명을 중앙극장이 아닌 대생좌로 기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부산극장은 부산영화극장으로 바뀐후 운영되어오다 광복을 맞으면서 관련 극장주들과 함께 현상금을 내걸고 일제강점기에 사용되어 오던 일본식 극장명을 모두 개명했다. 부산극장은항도극장, 삼일극장은 조일영화극장, 대화관은 대화극장, 동래극장은 동래 영화극장, 소화관은 조선극장, 대생좌는 대생극장, 수좌는 항구극장, 상생관은 대중극장, 보래관은 국제영화극장으로 바뀌었다. 그 후 항구극장과 구포극장을 제외한 극장들은 또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졌으며 대화극장은 폐관 때까지 무려 7차례나 개명되기까지 했다.
활동사진 상설관 시대의 흥행은 오전 11시 30분, 오후 5시 30분 두 차례 입장됐다. 오늘날과 같은 1회 1편 상영 시스템이 아닌 1회 상영에 여러 편의 영화가 스크린에 올려졌다. 1915년 3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 보래관에서 상영된 활동사진 프로그램을 보면 실사(다큐멘터리) <스코틀랜드해안>, 골계(희극) <도시와 벽지>, 희극 <남편을 속이지마>, 태서[외국영화] 대활극 전 2권짜리 <도망가버린 열차>, 장척 태서 대활극 <육지와 하늘>, 신파비극 <결사대>, 武林唯七 주연의 전 4권짜리 일본구극 <충신의사실록> 등 7편이나 됐다.
초기의 실사, 골계, 희극 등 다양한 장르의 활동사진들은 편당 상영시간이 보통 1권(10분 상영) 내외의 짧은 영화가 대부분이어서 극장은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영사기사와 무성영화의 해설을 담당했던 변사가 다음 작품 상영을 준비하는 동안 악사들은 음악을 연주하는 등 관객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1920년대에 들면서는 장편영화 제작이 늘어나면서 3편의 장편물이 상영되어오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1일 4회 상영 시스템으로 경영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1월 1일 소화관은 일본 대영이 제작한 <출정 전 12시간> 1편과 짧은 실사물 <일본뉴스>를 상영하면서 영화관은 모두 1회 1편 상영 원칙이 도입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시스템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한번 입장하면 오랜 시간 영화나 공연을 관람했으므로 개인업무가 있었던 관객은 극장문을 지키는 기도라 불리운 사람으로부터 팔뚝에 확인도장을 받고 나갔다가 보여주며 재입장된 풍경도 이 시절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