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세운 문화정책은 내선일체를 가장하여 민감하게 통제한 분야가 활동사진(영화)이었다.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의 부산지역 영화관에서는 지나사변을 비롯하여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벌인 자국의 침략전쟁과 관련한 홍보 영화가 수시로 상영되었으며 자국민(일본인)은 물론, 조선인 징병을 독려하는 홍보수단으로 철저하게 이용해 왔다. 특히 악영향을 고려한 나머지 조선에서 상영된 영화의 검열과 통제는 종전보다 더욱 강화되었으며 1936년에는 외국영화 상영을 3/4으로 축소하는 정책을 발표한 이후 1937년 1월에는 다시 반으로 축소하고 그 해 11월에는 아예 수입금지령이 공표됐다. 1940년 들어서는 8월 1일자 공표된 조선영화령에 의해 부산부 내에 있던 모든 상설영화관에서는 1회 상영시간이 3시간 이내로 통제됐으며 종전의 1일 2회 상영 프로그램이 3~4회로 편성되어 수 편 상영이 아닌 2~3편 이내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 제작도 1942년 들어 관제 어용 법인화되는 조선영화(주)에 의해 영화가 제작됐다. 일련의 정책 변화로 인해 프로 수급에 애로를 느끼게 된 부산의 각 극장들은 과거 상영된 바 있는 조선 영화를 재상영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홀대당해 오던 조선영화가 공식 상영되기 시작했다. 1936년 이명우 감독의 발성영화 <춘향전>(1935)이 소화관에서 첫 상영된 후 대생좌, 수좌, 대화관 등에서 조선영화가 상영됐으나 작품은 이미 오래전 흥행되었던 무성영화들이 대부분으로 고작 2일 내지 3일간 상영되는 정도였다.

1937년 나운규가 사망한 이후 재상영된 그의 영화는 생전의 유명세 만큼이나 대단했었다. 춘사의 출세작 <아리랑>(1926)을 비롯하여 <풍운아>(1926), <낙화유수>(1927), <금붕어>(1927), <홍련비련>(1927), <낙양의 길>(1927), <세동무>(1928), <약혼>(1929), <사나이>(1928), <철인도>(1930), <회심곡>(1930) 등의 무성 영화가 다시 돌아가자 과거 명성이 자자했던 변사들이 재등장하면서 광복 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기까지 이어져가게 된다. 조선영화 상영에 가장 인색했던 상생관과 부산 영화극장은 일제가 협력해서 만든 어용영화 <조선해협>(박기채 감독)을, 보래관은 <거경전>(방한준 감독) 단 1편씩을 상영하였을 뿐 대부분 기피하거나 배제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