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오가와 시대(1934년~1945년)
부산극장이 개관되던 해 오늘의 중구 지역에는 행정의 보래관(1914년~1973년)과 태평관(1922년~1943년), 남빈정의 소화관(1931년~1968년)이 인접해 있었으며 옛 시청(현 롯데시네마 광복점) 앞 본정의 상생관(1916년~1976년)과 영도구 영선정의 수좌(1924년~1990년), 동구 초량정의 중앙극장(1930년~1980년) 등 모두 7개 극장이 상존해 있었다. 그 중 부산극장과 경쟁 관계에 있던 곳은 태평관 1곳 뿐이었으며 5개 극장은 영화 전용관이었다.
부산극장의 설립은 남선일보(南鮮日報) 대표였던 오가와 요시조가 10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동경 가부키좌의 건축양식으로 신축한 연극 전용 극장으로 출범됐다. 개관 상연작은 동서합동 가부키 마쯔모도 긴노스께(松本錦之助)와 나까무라 스에노스께(中村末之助) 외 60여 명 일행의 대일좌가 공연됐다. 입장료는 특등석 2원 50전, 갑 1등석 2원, 을 1등석 1원 80전, 2등석 1원 30전, 3등석 80전의 다섯 등급으로 분류되어 매우 비싼 요금을 받았다.
극장 주소지는 부산부 서정 1정목 9번지11에서 소화통 2정목 16번지12, 남빈정13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됐으며 극장명은 1944년 부산영화극장으로 개명 경영되어 오다가 광복을 맞았다. 극장 경영은 오가와에서 보래관 관주 이와사끼 다께지가 대표를 역임했다. 그러나 이와사끼는 이에 앞서 1937년 보래관 재신축공사에 들어가면서 철거 익일부터 영화상영을 부산극장에서 연속 상영케 함으로 당시 부산극장 대표 또는 경영에 관여해 온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그 후에도 이와사끼는 광복기까지 경영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광복 직전 오가와가 부산극장을 소화관 소유주인 사꾸라바 후지오에게 넘겼다는 기록(1991년 5월 27일자 국제신문 “부산의 상맥(37) 적산(敵産) 어디로 갔나(8)”)에 의하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언으로 정부수립을 전후해 김인득(벽산그룹 창업주)이 관리인을 맡게 된 것도 김인득의 관리인 임명을 일본인 소유주 사꾸라바와의 관계 때문으로 알고 있다고 부산흥행업계 B씨의 회상을 근거한 주장으로 본다면 광복 직전까지는 사꾸라바가 경영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시기 관련 자료가 충실하지 못해 사꾸라바 대표의 B씨 회상의 실체확인은 검증되지 않고 있다.
오가와 시대를 엿볼 수 있는 기록으로는 「한국극장사(5)」(1979년 11월「한국연극」 박노홍)가 유일하다. 이 극장은 옛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극장이다.
소화관 바로 뒤에 세워진 이 극장은 연대로 보아… 1929년경(필자주: 1934년의
잘못)에 세워졌다. 평양의 金千代座와 대구의 대구극장이 부산극장과 형태는 같
은 것이다. 일본의 연극과 가부키를 상연한 무대는 넓었다. 다다미를 깐 좌석이나
하족번(下足番)이 으레 있었다. 해방이 되어서도 무대에는 도령이라고 하여 무대
전반에 관한 책임자가 있었다.
1937년 9월 3일 미국 워너사의 <끝없는 여행>(1932), 닛카츠의 <아따로갓 전후편>과 <벌거숭이 거리>, 뉴스영화 <아사히 세계 뉴스 특보 전화의 상해> 상영을 시작으로 영화상영관으로 변신하는 부산극장은 미국영화 <애원이중주>, <무한의 푸른하늘>, <생활과 연애>, <뇌우의 살인>, <풍운아아도바스>, <템플의 등대수>, <춤추는 아메리카함대>, <나아가 용기병>, <스타와 선수>, <샌프란시스코>, <새벽의 폭격대>, <눌러앉은 결혼>, <밀림의 복수>, <춘희>, <라모나>, <네 개의 연애>, <처와 여비서>, <석양특급>, <격노>, <은반의 여왕>, <타잔의 역습>, <나는 바다의 아들>, 독일영화 <회의는 춤추다>, <미완성교향악>, <마즐카>, <여순항>, <스파이전선을 살피다>, 프랑스영화 <열풍>, <남방비행>, <벌거숭이 여왕>, 체코영화 <거인고렘> 등 다양한 외국영화가 상영됐다. 일본영화 상영작은 90%이상 닛카츠 작품이 차지했으며 그 외에도 신흥영화가 공급됐다. 미국영화는 메트로, 워너, 20세기 폭스사, 독일영화는 우파 및 시네아리안츠사의 작품이 주로 배급, 상영됐다.
1944년 들어 부산영화극장에서는 외국영화 상영이 전무했으며 일본영화 일색이었다. 일본영화는 동보, 대영, 닛카츠, 쇼치쿠, 신흥영화 등의 작품이 주로 공개됐으며 조선영화는 3월 11일부터 14일까지 친일어용영화 <조선해협> 1편이 유일하게 상영되었다.
11 「신부산대관」 부산출판협회, 1934년
12 「부산안내」 부산관광협회, 1939년
13 「영화연극」 조선영화연극 상설관 명부, 194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