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역 역시 정치, 사회적으로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가 횡행하면서 경남도지사에 취임하는 하리스는 9월 25일부터 밤 8시 이후 익일 4시까지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 치안유지를 강화하면서 통제해 나갔다. 해방 공간의 부산 극장가 또한 작품수급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신작 공급이 어려워지자 공연물과 과거 상영되었던 영화가 재상영되었으며, 일부에서는 비정상적인 편법 운영이 속출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는 9월 23일을 기해 “일본제 영화상영과 각 가정의 일어음반 사용이 아직도 성행하고 있는데 대해 이러한 현상은 일본색(日本色) 타파와 새조선 건설에 많은 오점을 남기는 일”로 3개항의 지시 사항을 내려 이행하게 했다.

1. 각 영화관의 경영자를 소집하여 취지를 보급시키고 주의를 환기 할 것
2.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의 방침에 협력하기를 부정하는 업자에게는 단호히 탄압의 태도를 취할 것.
3. 각 가정의 일어음반에 대하여는 가급적 소유자를 호별 방문하여 자숙을 강조하며 절대 현품의 몰수 파손등 탈선한 행위는 하지말 것.01

일련의 현상은 광복 한 달 여 후가 지났음에도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채 상영할 영화가 부족하자 아무런 죄의식없이 일어난 행위들로 통제가 쉽지 않았던 시기였다.

일본인 경영주가 떠난 부산의 각 극장들은 근무중이던 직원들이 극장을 접수한 후 우선 방어권을 주장하며 지켜나가던 중 소화관, 보래관, 상생관, 부산영화극장이 중심이 되어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의미에서 12월 17일 ‘사꾸라바산업 주식회사 관명 선정위원회’가 조직되어 현상금 4,000원을 내걸고 ‘새 영화 관명 모집’ 공고에 들어갔다.02 새 극장명 응모에는 무려 20,735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소화관은 조선(朝鮮)극장, 보래관은 국제영화(國際映畵)극장, 부산영화 극장은 항도(港都)극장, 상생관은 대중(大衆)극장으로 각각 결정되면서 새 극장의 이름03은 1946년 1월 1일부터 사용에 들어갔다.

나머지 극장들도 개명에 들어가 수좌는 항구(港口)극장, 대생좌는 개관때의 중앙극장으로 복원됐으며 대화관은 대화극장, 삼일극장은 조일영화(朝日映畵)극장, 동래극장은 동래영화극장으로 각각 바뀌었으나 구포극장은 그대로 사용되었다. 개명에 이어 가부끼극장의 외관을 지닌 부산영화극장이 새롭게 단장되는 등 부산의 극장가는 1945년을 어수선하게 넘겼으나 미군정청은 1946년 3월 15일을 기해 일인 소유물로 남겨진 적산극장 일체를 경남도 홍보실 상공부 중심으로 관리인을 선정하여 관리하게 했다.04

관리인 선정 이유는 새 시대의 참문화 건설이라는 명제아래 문화인을 중심으로 영리를 떠난 극장운영을 시도한다는 발상이었다.

관리인으로 선정된 사람은 조선극장에 화가 양달석과 연출가 신고송, 국제영화극장은 평론가 이양기와 연출가 강상신, 항도극장은 소설가 김정한과 연출가 이재봉, 대중극
장은 평론가 이미근과 실업가 이현수, 항구극장은 미술가 서성찬과 연예인 윤창원, 중앙극장은 국문학자 유열과 연예인 이정화, 대화극장은 교육영화, 연극연출가 장인달과 연예인 이능문, 삼일극장은 극작가 김종명과 출판업자 이병희, 동래극장은 작곡가 박영식과 연예인 변영조가 각각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들 극장에 종사했던 직원들은 단합하여 강력 반발한 나머지 극렬하게 저항해 나갔다. 3월 17일자 민주중보 1면에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미군정청을 향해 그동안 참아만 왔던 울분을 쏟아냈다.05


성 명 서
“예술가냐? 모리배이냐? 예술연맹간부일부 극장관리권 독점을 기도(企圖)”

과거 36년간 일본 제국주의하의 부산 흥행계의 종업원 일동은 비참한 생활에 정신적 타격을 받고 왔으나 감격에 넘치는 8·15일 조국해방의 종성이 방방곡곡에 부르짖을 때 종업원, 종전 극장 관계자를 대표자로 추천하여 종업원과 경영주가 일환(一丸)하여 원만이 건국도상 ◦조선 예술문화 계몽사업에 희생적 노력을 하고 왔으나 도홍보실에서는 양심적 문화인이라는 미명하에 ◦공부 소속의 적산물 관리인 선정을 홍보실과 상의하도록 발기◦◦ 그 일인 극장 관리인 추천권을 홍보실에서는 예술연맹에 위임시켰다! 행정권을 사상적 단체 ◦분양시켰나는 문제와 유이한 사실을 세인은 주목할 필요가 없느냐? 예술을 주장하는 예술연맹에서는 단순히 국유배달의 예술과 문화계몽만 저지질 것이지 극장 경영이라는 문제는 ◦◦에서 생긴 말인가. 우리는 이점에 대하여 사회일반에게 공개하는 바이다. 만고 예술연맹에서 순일한 예술을 사랑한다면 경영에 대하여는 경영주에게 일임하고 다만 출연에 대하여 협력과 지도함이 가장 적당한 예술인 자체가 아닌가. 이 자체 입장을 불구하고 경영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반듯이 모리적 야심이 잠재한다고 생각하며 불언(不言)이면 경험이 풍부한 경영주를 무시한 전제가 아닌가? 모리와 전제가 아니면 단체적 사상 선정기관을 도모코져 극장을 이용하여 대중을 좌우로 분열시키자는 음모가 아닌가. 참다운 연극과 문화를 사랑하는 시민제씨여 이 무리들의 취하는 책동이 옳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수락치 못한다는것은 시민제씨가 잘 아는 바가 아니오리까. 하물며 예술을 주장하는 이내들의 금번 행동은 반듯이 예술을 월탈한 모리적 전제가 아닌 ◦이 문제에 대하여 공법적 조직하에 있는 현 경영주 및 종업원 일동은 비합적, 야심적, 모리적인 그 무리들의 행동에 대하여 선량한 시민제씨◦ 정당한 여론을 기대하며 최후까지 정의의 민주주의하에 대항함을 성명합니다.

1946년 3월 17일
조선흥업 주식회사 사장 대표 이현수
조선흥업 주식회사 직원일동 대표 김행전
조선극장, 보래관, 상생관, 부산극장 수좌, 대생좌,
대화관, 삼일극장 총 종업원 대표자 홍봉복
삼일극장 대표자 이병희, 윤강술
대화관 대표자 이능문, 임지영
대생좌 대표자 이정화
수좌 대표자 정방◦, 윤은원
조선극장 대표자 이현수, 김행도06

극장측의 저항이 완강해 칠레스트 대령은 문화인의 극장관리를 전면 백지화하면서 그동안 관리해 오던 극장 종업원들이 극장을 계속 운영하게끔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리면서 사건은 종료되었다. 미군정이 마감되던 1948년 부산 인구는 501,890명으로 1945년 281,160명의 배 이상 증가세를 보였음에도 극장은 북성극장이 1947년 개관하여 수치상으로는 총 11개소였으나 내부적으로는 문화극장이 미군전용극장으로 이용되고 있어 부산의 실제 가용 극장 수는 광복 후의 10개소와 같은 제자리걸음 상태였다.

이 시기 부산영화극장은 항도극장에서 부산극장, 도립 부산극장으로 중앙극장은 한벗극장, 조선극장은 동아극장, 조일영화극장은 삼일극장에서 제일극장, 대화극장은 부산진극장에서 은영극장, 동래극장은 동래영화극장에서 동래극장으로, 대중극장은 부민관으로 각각 바뀌어 경영되고 있었다.

개명이 잦았던 이유는 불하되거나 관리자, 임대자가 바뀌면서 새롭게 출발을 다짐한 나머지 새 이름으로 바뀌는 부작용이 이어졌었다. 극장가의 프로 수급은 우리 영화 제작이 원활하지 못한 나머지 외국영화 상영과 공연물에 의존했었다. 당시 극장 경영은 영화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공연물 의존 상태가 심각했다. (그 실태는 본문 소화관의 조선극장시대 188쪽과 부산극장의 도립 부산극장시대 215쪽 참고) 우리영화 신작은 1946년 <자유만세>(최인규)를 시작으로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 이구영의 <안중근사기>, 1947년 <3·1혁명기> <민족의 새벽>(이규환), <의사 윤봉길>(윤봉춘), <새로운 맹세>(신경균), <불멸의 밀사>(전영순), <그들의 가는 길>(임운학), <그들의 행복>(이규환), <패자의 수도>(유장산), 1948년 <홍차기의 일생>(임운학), <유관순>(윤봉춘),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여명>(안진상)이 개봉됐을 뿐 우리 영화 공급에 차질을 가져 오자 극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제강점기에 상영된 바 있는 묵은 영화를 재상영했다.

<무지개> <장화홍련전> <사나이> <수선화> <역습> <아리랑고개> <숙영 낭자전> <나그네> <아리랑> <애련송> <성황당> <심청전> <처의모습> <춘풍> <안해의 윤리> <홍길동> <오몽녀> <새출발> <집없는 천사> <풍년가> <청춘의 십자로> <순정해협>등이 상영되면서 변사가 재등장해 무성영화 시대로 회귀했던 때였다. 특히 <백의처녀> <낙양의 절문이> <인생간주곡> <인생출발> <희망의 봄> <사랑의 봄> <순정> <산적의 비밀> <여자의 서름> <바다의사나이> <청춘교향악> <굿세인남매> <그리운 고향> <밝아가는 인 생> <탄식하는 소경> <세기는 부른다> 등의 우리 영화는 당국과 관객의 눈을 속이면서까지 이미 상영된 바 있는 영화의 제목을 교묘히 둔갑질시켜 흥행몰이를 하는 불법을 자행한 사례들이 비일비재했다.

수입외화는 부산극장, 조선극장(동아극장), 부민관(후일 시민관)의 3파전으로 이들 극장들이 모두 독차지 상영하다시피 했다. 상영작은 미국영화 <골덴보이> <공작부인> <그레이트 왈츠> <나의 길을 가련다> <노틀담의 곱추> <대서양의 비밀> <타잔의 복수> <로즈마리> <비는 온다> 등, 독일영화 <거인 푸링켄박사> <곡예단> <궁전음악회> <미의제전> <새벽의 비상선> 등, 프랑스영화 <불란서좌> <사랑의 상속자> <암흑가의 여성> <여자만의 도회> <애기소동> <자유를 우리에게>가 개봉되었다. 일부 영화 중에는 일제 때 상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거성 지그펠드> <공중극장> <왕중왕> <거인고렘> <망향> <무역풍> <만춘의 곡> <쁘라그대학생> <북해의남아> <부르그극장> <시카고> <산프란시스코> 등이 재수입되어 상영되기도 했다.

당시 극장의 무질서한 경영에 대해서 당국이 철퇴를 가한다고는 했으나 속수무책이었으며, 일부 몰지각한 극장은 미군부대 등지에서 필름을 갖고 와서는 뉴스영화라는 명목으로 당국의 검열을 받아 흥행을 했다. 영사기가 맞지 않으면 녹음을 지워 없애고 무성영화를 만들어 상영하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사태로 달리 놀 거리도 놀 곳도 없었던 당시로서는 영화관이 최고의 레저시설이어서 영화관은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왕자극장 대표 김명수는 회고했다.07


01 1945년 9월 24일 민주중보
02 1945년 12월 17일 민주중보
03 1945년 12월 25일 민주중보
04 1946년 3월 17일 민주중보
05 1946년 3월 17일 민주중보
06 성명서는 광복직후 개명된 극장명을 사용한 곳은 조선극장 1곳 뿐이며 동래극장은 제외, 구포극장은 부산부 지역이 아니므로 포함되지 않았다.
07 「비화 8·15전후(20), 초창기 연예계」 1985년 10월 7일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