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에 벽화가 장식된 극장, 국제관 (1920년~1929년)
✽ 극 장 명 : 국제관(國際館: 고구사이간)
✽ 주 소 지 : 부산부 안본정(岸本町) 5 / 중구 중앙동
✽ 개관일자 : 1920년 8월 22일
✽ 폐관일자 : 1929년 2월 27일 화재로 소실
✽ 관 주 : 기노시다 모도지로(木下元次郞)

영화, 연극 전용극장인 국제관은 극장 천정에 벽화가 그려져 아주 특별했던 곳으로 소문난 극장이다. 위치는 거류지 내 토지 등급 중 가장 비싼 일급지로 조선철도의 출발점이요, 부산의 관문 구실을 하던 중앙동 옛 부산역(1953년 화재로 소실) 앞에 자리하여 더욱 명성을 떨쳤던 시민의 대중문화 공간이었다. 극장명도 지역 명칭이나 극장주의 이름을 딴 일본식 명이 일반적이던 때 나날이 성장 발전해가는 부산의 미래 지향적인 의미를 담아 국제관으로 명명됐다.

국제관의 외형은 르네상스 일본 절충식 건축양식으로, 건물 전면 한 칸기둥까지만 근대식으로, 나머지 부분은 동서양 절충식으로 구성된 건물이다. 상부에 지붕 내밀기 디자인은 당시로서는 꽤 획기적인 디자인 발상을 갖춘 건물로 본다(이형재 건축사 고증). 국제관이 세워진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1910년대 변천좌, 동양좌, 질자좌 등 10여 개 극장들이 난립하다 경영악화로 모두 사라지고 1918년에는 부산좌, 보래관, 행관, 상생관 4곳 으로 평정된 이후 1920년대 들어 처음으로 세워진 극장이 국제관으로, 뒤를 이어 1921년 유락관, 1922년 태평관, 1924년 수좌가 각각 세워지면서 총 8개의 극장과 함께 상존 경영된 곳이다.

이 시기 부산 극장가는 무성영화 시대의 전성기를 거쳐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를 맞는 전환기였으나 개관 10년만인 1929년 국제관이 화재사고로 소실된 이후 연이어 행관(1930), 유락관(1932)마저 화재로 문을 닫게되자 뒤를 이어 중앙극장(1930), 소화관(1931), 부산극장(1934)의 새극장 탄생으로 이어졌다.

국제관은 주주 194명(4,000주) 중 200주씩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대주주 4명 중 기노시다 모도지로가 대표에, 야마무라 마사오(山村正夫)가 전무, 요시오까 시게도미(吉岡重實)와 시게도미 이하찌(重富伊八)가 각각 취체역으로 참여하여 공동으로 경영13되었다. 경영진에 참여한 그들은 모두가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경제인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들의 이력을 보면 기노시다(1876~?)는 토목건축청부업, 일화생명보험회사, 미국텍사스유회사대리점, 부산자동차(주) 이사 및 대표, 조선양토장려회(주) 이사 외에 1912년 부산상업회의소 평의원을 역임했다. 야마무라(1887~?)는 광도현 출신으로 1902년 조선에 와 선친의 금물상을 경영, 선남은행 취체역, 부산신탁(주) 전무, 조선신탁회사 취체역, 만주 도문시 연초원매팔소를 경영했다. 1928년 부산상업회의소 의원, 부산 산업조사위원, 부산상공회의소 금융부장을 역임했다. 요시오(1891~?)는 일본 복강현 출신으로 1905년 조선에 건너와 일한창고(주), 한국창고(주), 조선흥업(주), 북빈매축지 경영, 부산화약총포(주) 취체역, 부산염업상회 대표, 1920년 부산학교조합의원, 부산부협의회원을 역임14했다. 국제관의 설립 자본금은 20만 원, 불입금 13만 원이 출자되어 상설활동사진 영업을 주목적으로 활동사진필름의 제조, 판매, 임대, 위탁 매매, 연극 및 제흥행경영중개업, 극장임대업으로 허가되었다. 극장 국제관의 역사에서 최고 화두는 조선 최초로 부산에 세워진 영화제작사인 조선키네마(주)에 행운을 맺어 준 무대가 된 장소였기 때문이다. 1924년 무대예술연구회 멤버들인 조선의 연극인 안종화, 김정원, 유수준, 엄진영, 이경손, 이채전 등이 톨스토이의 <부활>, <월광곡> 등의 작품을 국제관 무대 위에 올려 갈채를 받던 중 이들의 연기를 눈여겨 본 재부일본실업인들이 마침 해산되는 우리 연극인을 입사시키는 조건으로 조선키네마(주)가 탄생을 한 것이다.

국제관이 영화관으로서의 영업경영은 기존의 보래관, 행관, 상생관의 득세에 밀린 나머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채 부산좌와 함께 연극공연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1921년 3월 1일자 조선시보 연예안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영화상영 안내광고는 기존의 3대 영화관에 비해 열세를 금치 못했다. 부산역전, 고등상설 활동사진 국제관, 2월 19일 사진 전부 교체, 실사 <시사화보>1권, 희극 <하루하루의 건강>1권, 구극 <인술삼용사>, 태서활극 <지옥의 입>전 5권, 신파비극 <죽음의 의상> 장척3관 모두가 연속활극물을 앞세워 관객몰이에 집중공세를 펼치고 있었으나 국제관은 그렇지 못했다. 보래관은 미국 바이타그라브사 특작, 출연 말 5,000여 두, 대모험 대활극 <곡마단의 비밀> 전 15편 30권 중 제1, 2편, 4권 상영, 상생관은 연속탐정대활극 제5회 <저주의 집> 제9편 독의부는화살, 제10편 대거짓말쟁이, 4권 상장, 행관은 미국 파테회사 루스롤란드 주연, 미국 연속 모험 대활극 제3회 <루스의 모험> 제5편 은행강도, 제6편 국경털이, 4권 상장식으로 집중적인 작품홍보를 했다.

이미 뿌리를 내린 보래관과 상생관은 프로 배급의 중요성을 과시하듯 일본 최대 영화제작사의 특약점을, 행관은 매일 주야 2회 상영을 강조했다. 그러나 신생 국제관은 상영프로의 취약성을 대신하여 극장 위치와 고등상설관임을 강조함으로 다른 영화관의 영업전략과는 비교가 되지는 못했다. 반면 국제관에는 서울에 본거지를 둔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자주 올랐는데 요금이 비쌌다고 박원표는 회고했다. 국제관에서는 12권짜리 장편영화 <아! 무정>을 비롯하여 9천 척, 14권짜리 종교영화, 세실 B데밀 감독의 <십 계>(1923년 파라마운트)가 상영되기도 했으나 다른 영화관에 비해 외화프로는 매우 열세였던 반면 조선영화 상영은 빈번했었다.조선키네마(주)의 3, 4회작 왕필열 감독의 <신의 장>, <동리의 호걸>(1925), 김영환 감독의 <장화홍련전>(1924), 이경손 감독의 <심청전>(1925), <개척자>(1925), <장한몽>(1926), 이구영 감독의 <쌍옥루 전후편 >(1925), 김수로 감독의 <괴인의 정체>(1927) 등이 상영됐다. 국제관은1925년 1월 자본금 20만 원이 10만 원으로 감자(減資) 처리되는 등 경영상의 애로를 겪어 오던 중인 1929년 2월 27일 연통의 불꽃 발화로 인해 발생한 화재사고로 공연 중인 일본의 제2신국 극단 사와다(澤田) 일행의 출연배우 4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경상을 입는 인명 사고를 내고 전소되면서 개관 10년 만에 역사 속으로 퇴장되는 비운을 맞았다. 손해액이 109,000원으로 폐관 때 주소는 대창정 4정목 40번지(1929년 2월 28일 부산일보)로기록되고 있다.

활동사진 상설관 시대의 부산은 잠시나마 영화 도시를 꿈꾸었던 하나의 사건이 태동하였다. 1924년 7월 11일 우리나라 최초로 부산에서 영화제작사가 설립되어 제작과 배급, 흥행을 두루 갖추었던 시대가 1년 남짓 존속했다. 조선인 연기자와 재부 일본인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하여 출범한 조선키네마(주)는 <해의 비곡(海의 秘曲)>, <총희의 연(寵姬의 戀), 일명 운영전(雲英傳)>, <신의 장(神의 粧)>, <동리의 호걸(洞里의 豪傑)> 등 4편의 영화를 제작 후 1925년, 1년 만에 해산되지만 영화사적으로는 매우 미래 지향적이었음을 예견케 해 주었던 일이었다.


13 조선은행회사요록. 1921년. 동아경제시보사
14 홍순권 「일제시기 재부산 일본인사회 주요인물」 조사보고,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