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의 문화극장은 극장으로서 제 구실을 하기까지는 매우 험난했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1945년 9월 17일 미 제24군단 소속 제6사단이 부산에 진주하면서 국제영화극장(國際映畵劇場)은 정부로부터 징발되어 미군 전용극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 1948년 10월 미군 철수와 함께 극장은 한국정부에 반환되지만 적산이었던 문화극장은 문교부가 직접 관리에 들어간다. 같은 해 12월 문교부는 부산 동래 출신의 극작가요, 연출가이자,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을 지낸 한형석에게 극장 설치 책임 및 관리자로 임명하여 운영케 했다. 그후 극장장으로 취임하는 한형석은 1949년 4월부터 국립극장으로서의 무대확장 및 증축공사를 진행하지만 1950년 4월 국회가 이를 부결시키자 내부공사까지 중지되고 만다. 그러나 한형석은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지 못한 극장 시설을 자비를 투입하여 재정비 한 후 문교부 직할 부산문화극장으로 거듭났다. 그 해 6월 18일 예술극회의 국악 연주단 일행이 이끄는 <지족선사와 황진이>(박진 연출)가 문화극장 무대에서 개관작으로 상연되었다. 이 작품에는 당대를 대표하던 연기자요, 후일 한국영화의 대표급 스타로 활약하게 되는 강계식, 장일호, 고선애, 윤인자, 문정숙 등이 출연했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문화극장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일 언론에 보도된 광고카피는 “민족 예술의 봉화!! 50만 시민 2년간 대망리에 당당 등단! 신장 완료, 항도의 문화전당 개관, 문화극장(구 보래관)” 그러나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개관 1주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문화극장은 9월 1일부터 10월 6일까지 임시수도 부산의 국회 의사당08으로 사용되었다. 이어 같은 해 10월 13일부터는 경상남도 계엄 사령부에 의해 재징발되어 UN군으로 참전한 미군전용 위안극장(Special Services Theatre)으로 다시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극장은 1953년 4월 20일 미군관리장교의 사실(私室)에서 발생한 화재사고로 인해 극장 기능이 상실되자 미군측이 극장을 경상남도에 12월 29일 반환 인수되어 관리에 들어갈 무렵,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 사건으로 인하여 부산우체국이 소실돼 버리자 강인택 체신부장관은 김법린 문교부장관에게 극장을 부산체신청이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을 했다.

그러자 극장시설이 왜곡되게 특정시설로 사용되는 것을 반대하는 부산시민 단체의 성명서09까지 나오기에 이른다. 1954년 1월 19일 부산극장문화협의회,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남지부, 경남언론인협회는 “문화극장은 예술의 도장이고 국민의 위안처이다. 문화시설이 빈곤한 우리나라로서는 극장은 실로 시청각을 통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위로해주는 사회시설이다. 문화극장은 부산 백만 시민의 최대 유일한 문화전당이다. 「극장은 극장으로」 재건(再建)하라. 문화극장의 체신청 사용을 반대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으나 극장으로서의 기능으로 돌아오기는커녕 문교부로부터 승인을 얻은 부산체신청은 부산우편국 국제우편과로 사용에 들어가 1954년 6월 30일 종료와 함께 반환되었다10.

그러나 문화극장이 제자리로 돌아가려 할 즈음 화재사고가 난 극장의 내부수리가 요원하여 휴관되어 오던 중 1955년 4월 2일 제3육군병원 2병동에 들어있던 상이용사들이 부산에 내려온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자 대통령의 지시로 의용촌에 문화극장 운영권을 주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의 문교부 관리권은 다시 국방부로 이양되었고 극장이 정상화되기까지는 또다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예산난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의용촌측은 퇴역 중령인 권녕호와 5년간 월 90만 원의 사용료 지불조건으로 임대 계약을 한다. 그러나 권녕호마저 자금난을 겪으면서 권은 1960년 5월 10일 이광정에게 운영 및 관리위임 계약을 체결 넘기게 된다. 이광정 역시 운영능력의 한계로 인해 1961년 1월 23일 이영일에게 월 130만 원의 사용료 지불조건으로 2년간 임대계약 되는 악재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5·16군사혁명 정부는 이영일을 상대로 문화극장 점유 사용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면서 점유권을 두고 오랜 분쟁 끝에 불하되면서 극장은 길고 지루한 과정과 오랜 공백기를 지나 시민의 진정한 문화 공간으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문화극장 시대를 맞이했다.


08 국회기록보존소는 문화극장에서 1950년 9월 1일부터 10월 6일까지 임시수도 국회의사당 사용기간으로 밝혔으나 1959년판 합동연감(1958년 11월 20일 합동통신사 발행)은 1951년 1월 15일 개원했다고 밝혀 기록이 상이함을 나타내고 있다.
09 1954년 1월 26일 부산일보
10 극장문화 제2호. 장로석, 1954년 7월 10일, 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