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하의 1970년대는 1971년 한국영화 진흥조합이 설립되면서 개정영화법 제2217호가 공포된 후, 1972년 들어서는 21개 제작사 중 부실 제작사 3개소의 등록이 취소되고 1974년부터는 분기별로 우수영화를 선정하여 외화수입 쿼터 1편을 보상하는 정책이 실시되어 한국영화산업은 장기침체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엎친데 덮친격으로 TV보급이 15만 대에 불과했던 1968년 이후 1970년 40만 대, 1971년 80만 대, 1974년에는 160만 대로 급증하면서 안방이 TV에 점령되자 부산 극장가도 불황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극장 폐관이 속출하면서 1970년대는 무려 25개소의 극장이 문을 닫았다. 반면 개관된 극장은 5개소에 그치면서 1979년 현재 부산의 극장은 총 37개소가 운영되어 1969년의 54개소에 비해 17개소의 많은 극장이 감소 현상을 보였다. 5개 극장의 개관은 중・동구 지역은 1곳도 없었으며 부산진구 부전동의 대한(大韓)극장, 남구 대연동의 용연(龍淵)극장, 부암동의 성지(聖知)극장이 1970년 개관됐으며, 1971년 동래구 반송동의 송원(松園)극장, 1975년 사상구 괘법동의 신영(新映)극장 등 서면을 중심으로 모두 세워졌다.

1970년대 폐관된 극장 25개소를 지역별로 보면, 중구가 자유극장(71), 문화극장(73), 미화관(74), 국제극장(76), 시민관(76), 남포극장(78), 현대극장(78) 등 7개소로 가장 많았으며, 동구는 수정극장(71), 초량극장(71), 동서극장(76), 대성극장(78), 대도극장(78), 천보극장(79) 등 6개소, 서구는 영남극장(77), 서부극장(78), 명성극장(78), 동양극장(78) 등 4개소, 부산진구는 북성극장(75), 이성극장(75), 태평시네마(79) 3개소, 남구는 보영극장(77), 광안극장(78) 2개소, 그 외 북구의 신영극장(75), 영도구의 영도극장(78), 동래구 송원극장(78) 등 각각 1개소였다. 부산 흥행가에 불어닥친 영향으로 사라져버린 극장 중에는 극장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역사성을 지닌 자랑거리 극장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문화극장은 1914년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보래관이 전신으로, 70미리 상영관으로 명성을 날렸던 부산의 명소였으나 1973년 59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옛 부산시청 앞에 자리했던 상생관은 광복 후 대중극장, 부민관, 시민관으로 개명되면서 개봉관에서 2, 3번관으로 시민의 사랑방 역할을 해 주었던 곳이었으나 1976년 60년만에, 1942년 수정동에서 대화관으로 출발, 광복 후에 대화극장, 부산진극장, 은영극장, 동양극장, 미성극장, 동서극장 등으로 여섯 차례나 이름이 바뀌며 나름대로 동구 지역을 대표하는 극장으로 자리매김했던 곳이 1976년 폐관됐다.

그 외에도 아쉬움을 준 곳은 광복 후 순 부산자본의 최초 단관이었던 서면의 북성극장이 1975년, 광복 후 현대식 건축물로 중앙동 시대를 열어갔던 국제극장(1976)과 현대극장(1978)이 경영난에 허덕이다 끝내 폐관됐다. 이들 극장은 상존 20년 전후의 현대식 건축물로 보존될 수 있는 가치가 충분했으나 개인소유로 인해 철거된 뒤 타용도의 신건축물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구전으로만 전해올 뿐 당대 극장가로 위세를 떨치던 분위기는 그 어디에도 흔적이 남겨져 있지 않고 있다.

1970년대 부산 극장가의 흥행 성적은 1960년대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만큼 반토막이 났다. 인구는 1970년 1,842,259명에서 1979년 3,034,596명으로 무려 1,192,337명이 증가하였으나 관객은 1970년 1인당 10.36회,71년 8.54회, 72년 7.26회 73년 7.01회, 74년 5.63회, 75년 4.35회 76년 3.71회 77년 4.40회 78년 4.35회, 79년은 3.78회로 1970년과 1979년은 무려 6.58회로 대폭 감소 현상을 보였다.

1970년대 부산 극장가의 불황 요인은 소위 안방극장으로 불리우던 TV의 급속한 보급 영향도 있었으나 극장에서 상영된 작품 검열로 인해 흥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대여서 더욱 그러했다. 검열에 의한 검열로 인해 관객이 제대로 된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전무했을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했다. 그 사례로 부산 출신의 하길종 감독(1941~1979)은 미국 UCLA에서 영화연출 학위를 받고 1970년 귀국하여 1972년 <화분>으로 데뷔했으나 개봉 결과는 화면단축 4곳과 미성년자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수 절>(1972)은 화면 단축 3곳, 화면 삭제 5곳, 대화 삭제 2곳으로 작품은 난도질당한 나머지 작품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되었다.

이어서 <바보들의 행진>(1975)은 화면 삭제 4곳, 화면 단축 3곳, 대화 삭제 3곳, <여자를 찾습니다>(1976)는 화면 단축이 무려 10곳, 화면 삭제 2곳, 대화 삭제가 3곳, <한네의 승천>(1977)은 화면 삭제 2곳, <속 별들의 고향>(1978)은 화면 삭제 7곳, 화면 단축 3곳, 유작이 된 최인호 원작의 <병태와 영자>(1979)는 가혹한 검열을 피해가기 위해 고심했던 나머지 제한사항은 1건도 없었으나 초등학생 입장불가 판정을 받았다. 계몽물인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군사물 <들국화는 피었네>(이만희)도 검열은 피해간 듯 했으나 초등학생 이상가 판정을 받아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던 시대였다.

외화 역시 가혹하다 못해 난도질 당한 나머지 장면 연결이 되지 않을만큼 만신창이가 된 영화가 상영되기 일쑤였다. 대표적인 영화는 1971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칸느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맛슈>였다. <맛슈>는 화면 삭제 17건, 녹화 삭제 2건, 화면 단축 2건, 대사 삭제 23건 총 44건이 검열에 잘려나간 채 개봉되면서 감상 내내 영화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만큼 어리둥절했었다. 그 외 상영된 작품 대부분도 그러했다. 루이즈 브뉴엘의 <세브리느>는 화면 단축 1건, 화면 삭제 5건, 대사 삭제 3건, 마이크 니콜즈의 <졸업>은 화면 삭제 5건, 대사 삭제 1건, 피터 이예츠의 <영러버>는 화면 삭제 9건, 대사 삭제 22건, 1973년 셀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깽들>은 화면 단축 2건, 화면 삭제 18건, 대사 삭제 2건, 프란시스.F.코폴라의 <대부>는 화면 단축 2건, 화면 삭제 3건, 대사 삭제 6건, 1975년 윌리암 프리드킨의 <엑소시스트>는 화면 단축 2건, 화면 삭제 2건, 대사 삭제 6건, 1977년 데이비드 린의 <닥터지바고>는 화면 단축 7건, 화면 삭제 10건, 대사 삭제 21건, 샘 페킨파의 <스트로우도그>는 화면 단축 15건, 화면 삭제 11건, 대사 삭제 1건으로 일련의 영화검열08은 관객의 눈과 귀를 봉해버린 결과를 가져오면서 그 여파는 관객과 극장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면서 부산 극장가의 흥행 침체를 가속화시켜 갔다.


08 「한국영화, 외국영화 검열 현황 편람, 1971년~1981년」 영화진흥공사, 198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