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의 대중문화
개항장 부산포에서 대대로 생활을 영위해온 주민들의 대중문화는 어떤것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 외에는 특별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개항기 신사유람단에 참여했으며 통훈대부행(通訓大夫行) 통리교섭 통상사무아문주사(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主事)겸 부산항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민건호(閔建鎬, 1843년~1920년)가 남긴 「해은일록(海隱日錄)」02에서 부분적이나마 일면을 돌아 볼 수 있어 소개한다.
해은일록은 해은이 일상업무 중 자리가 마련된 과정에서 지역민과 자연스럽게 함께 했었던 각종 문화의 단면들은 물론 개항이후 직접적으로 침투해 오기 시작하는 일본의 대중문화와 조우하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기록을 남긴 보고서인 셈이다. 해은은 1890년 11월 24일 일옥(日屋)에서 환술법(幻術法) 몇 종류를 구경했는데 참으로 놀랍고 괴상하고 의아했다고 적고 있다. 03 그것은 우리 가락, 우리 문화에 젖어 있던 그의 입장으로서는 미지의 외래 문화와의 만남에서 처음 느꼈을지도 모르는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가 본 부산의 문화는 기생이나 배우의 노래, 춤, 유희하는 여자와 악공을 불러 연주한 것이 가장 많이 나타났으며 사자의 유희, 명창의 노래, 창가, 가무, 계금과 삼현금이나 기악을 들었다. 그외 줄타기 놀이, 남사당 놀이를 구경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승무와 검무 등이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1884년 2월 8일 기생 3명을 불러 한 곡씩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별로 들을 만한 것이 없었다고 했다.04 기생이나 배우가 부른 노래가 창(唱)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종류의 노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별로였다는 것은 해은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래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창가(唱歌)는 1886년 배재학당의 교과과목에도 속해 있었던 것으로 갑오경장 이후 근대적인 각성과 조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서양식 창가 조로 읊은 시가(詩歌) 형식의 창가로 “창가를 듣고 삭희(索戱)를 구경했다”, “창가를 듣고 재인(材人)의 시예(試藝)를 구경…”, “창가를 들었는데 기생 세 명이 현악기, 관악기를 연주했다” 등, … 으로 기록하고 있다. 음식을 먹은 후 가무를 들었다. 가무란 신라시대 때 피리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하던 무악의 하나였으며 그 외 삼현금(三絃琴)을 들었다고 적었다. 삼현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현악기인 가야금, 거문과, 향비파를 이른 말이며, 계금(㮷琴)도 소개되었다. 기생을 불러 노래하고 검무(劍舞)를 추고 가무를 듣고 창부가(倡夫歌), 귀토가(龜兔歌) 같은 노래를 듣기도 했다. 기생은 춤, 노래 또는 풍류로 주연석이나 유흥장에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예기(藝妓)로써 신라, 고려시대부터 전승 되어 왔으며 당시 기생은 대중문화 활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88년 1월 8일 “밤에는 금고(金鼓) 유희(遊戱)를 하였다”, “사자의 유희도 역시 하나의 볼거리였다.” 05 금고란 군중이나 사찰에서 쓰던 징이나 북으로 된 종의 놀음으로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갖가지 놀이문화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특히 일반적으로 가면무로 행해지다 조선 순조 때 궁중에서 채택되어 전수되던 궁중무용의 하나였던 검무의 경우 기생 8명이 검무를 추었다고 했다. 많은 기생이 동시에 출연하는 공연이 펼쳐진 것이다. 검무 외에 승무(僧舞)도 선보였다.
그러나 해은은 일반인이 쉽사리 접하기 어려웠던 문화도 만났으나 지역민들과 자연스럽게 공유했던 남사당놀이와 줄타기 같은 대중적인 문화와도 자주 접했었다.
02 해은일록은 개항 8년 차를 맞던 1883년 11월 23일(음력)부터 1894년까지 기간에 해은이 부산에서 공식업무 수행을 일기체 식으로 기록한 근무일지이다.
03「해은일록」Ⅱ, 2009년 부산근대역사관
04「해은일록」Ⅰ, 2008년 부산근대역사관
05「해은일록」Ⅱ, 2009년 부산근대역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