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재(詩才)에 뛰어났던 해은 민건호는 우리 문화가 전통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문화가 들어와 공존해가기 시작하는 시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한 사람으로 그는 일본배우의 시예장(試藝場)이나 기예장(技藝場)에 초대되어 참관했다. 일본 영사관에서 열린 화희(火戱)를 구경하는 과정에서는 개항 후 가장 먼저 부산에 와서 자리 잡고 경제활동을 하던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와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와도 업무상 잦은 만남을 가졌다. 하사마와는 1891년 8월 30일 만인계에 대한 의논10 등으로 7차례, 오이케와는 17차례에 걸쳐 만났었다. 두 사람과 함께 배석한 자리도 2차례나 됐다. 이와같이 해은이 공적업무를 수행 중이던 기간동안 거류지에서는 1881년 ‘거류인민영업규칙’에 의한 가설극장 영업이 시작되었으며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 첫해인 1895년에는 ‘극장 및 흥행취체규칙’이 공표되어 옥내극장이 등장하면서 극장에서는 일본의 대중문화가 상륙해 운영되기 시작했다.

무대에 올랐던 공연물은 일본 전통의 스포츠인 씨름 스모를 시작으로 칼놀이, 위험한 행동하기(輕業), 말타기, 손춤, 마술, 발재주, 인형놀이, 그림자 그림, 해학적 놀이, 여덟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혼자서 하는 희극의 모사기술, 이야기, 만담, 제문읽기, 고대 인형극, 팽이 돌리기, 동물 부리기 등으로 이들 공연물은 일본 배우들이 부정기선을 이용하여 현해탄을 건너와 부산을 시작으로 각 개항장으로 이동, 순회하는 형식으로 공연되었다. 일본 공연단들은 부산의 극장에서 흥행을 하려면 소속배우의 성명, 예명, 나이, 흥행기간, 장소, 입장요금, 신발보관료까지 기록 제출함은 물론, 배우의 여권감찰을 첨부하여 경찰서에 제출해야 공연이 허가됐다. 공연을 위한 맹수나 조류를 보여줄 때는 위험이 없도록 견고한 울타리를 장치해야 했으며, 관객에게 추첨으로 당첨물건을 주는 행위나 기타 명분으로 돈을 걷지 못하게 했다. 공연중 극장 내에서 비윤리적인 행동이나 말을 해서는 안됐으며 이를 위반한 사람은 1일 이상 10일 이하의 구류 또는 5전 이상 1원 95전 이하의 과태료를 납부하게 했다.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도 1904년 들어서는 많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씨름, 손춤, 마술, 위험한 행동하기 종목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장르의 공연물이 선보이고 있어 개화기의 신문화가 새롭게 전이되고 있었다. 이들 공연물들은 남빈정에 소재한 극장 행좌와 행정의 송정좌에서 흥행이 이루어졌으며 극장이 부족시에는 가설극장 설치가 허가되어 운영됐다.

극장에서는 명치시대 자유민권운동의 청년활동가 이야기인 연극장사(演劇壯士)가 최고인기를 끌었다. 그외 연극 부연절(演劇 浮連節)과 11세기 초엽 완성된 일본의 문학작품을 토대로 했던 겐지모노 가타리인 연극 겐지부시(演劇 原氏節), 연극 옛날 배우(演劇 舊俳優), 죠루리제문(淨瑠璃祭文), 즉흥 민요(ウカレ節), 위험한 행동을 보여주는 곡예 흥행(輕業), 씨름, 활동사진 및 막간 희극(活動寫眞及ニワカ), 환등 죠루리(幻燈 淨瑠璃), 마술손춤(手品手踊), 비파흥행(琵琶興行)이 상연되었다.11 그 중 활동사진과 환등상영은 서양에서 수입된 신문화였다. 1895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유료 공개된 활동사진(영화)은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돼갔으나 부산에 상륙하기까지는 무려 9년의 세월이 흐른 1904년이 되어서였다.


10 「해은일록」Ⅲ, 2010년 부산근대역사관
11 「부산항세일반」 일한창문사, 1905년